▲화양연화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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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필름 덧붙인 명작의 귀환
<화양연화>는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홍콩 한 아파트에 이사를 온 두 가구가 있다. 지역신문사 기자 차우(양조위 분) 부부와 무역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둔 첸(장만옥 분) 부부다. 차우의 아내와 첸의 남편은 불륜관계다. 두 사람은 일상 가운데 아주 작은 흔적을 통해 조금씩 그 사실을 깨달아간다.
출장이 잦은 첸의 남편과 역시 집을 자주 비우는 차우의 아내다. 좁은 아파트에선 사소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차우는 첸의 핸드백이 아내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본다. 첸은 남편의 넥타이와 같은 것을 한 차우를 만난다. 불길한 예감은 이내 현실로 확인된다.
배우자의 외도와 배신. 외로움과 서러움이 싹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쉽사리 문제를 바깥으로 꺼내지 못하는 둘의 모습이 영화 내내 애달프다. 그 요동치는 감정 속에서 둘은 서로를 본다. 그리고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제 마음을 빼앗긴다.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번민하는 차우와 첸의 이야기가 비좁은 홍콩 어느 아파트를 배경으로 왕가위의 진득한 시선에 담겼다.
제목인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영화 속 등장하는 DJ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메이 양과 친구와의 우정을 기린다는 장 부인, 그리고 사업 때문에 일본에 있는 첸 선생도 이 노래를 청했군요. 아내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뜻하는 '화양연화'입니다"라고. 가장 큰 불행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이어지는 건 인생의 아이러니인가.
끝내 이뤄지지 못한 찰나의 감정과 제 곁에서 가라앉은 가정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면서도 차우와 첸에겐 그때 그 시절이 가장 아름다운 한때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제주도 어느 해변에 마구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다. 한 면만 보아서는 전체를 알 수 없다.
▲화양연화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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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영화 가운데 유독 강한 인상이 남는 장면이 있다. 첸 부인이 어느 날 참깨죽 100인분을 끓여 공동주택 주민들에게 한 그릇씩 돌리는 장면이다. 아내의 불륜을 알아채고, 또 첸 부인을 향해 일어나는 제 감정에 번민하던 차우가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고 난 다음 날이다. 그는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는다. 첸은 차우를 병문안 온 동료를 보고 그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참깨죽을 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한 번도 주방을 쓰지 않던 첸이 엄청난 크기의 솥에 참깨죽을 끓이던 모습이 이 영화 안에 담겼다. 그는 얼마나 매력적이었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또 얼마나 우아하고 애틋한가. 그 참깨죽 한 그릇은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나.
남몰래 마음에 품은 이에게 건네려 주변의 모든 이에게 같은 무엇을 주어본 적 있는 이라면 그 안에 깃든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테다. 나는 이야말로 영화가 사랑의 한 가지 얼굴을 작품 안에 붙든 순간이라 믿는다. 이렇게 <화양연화>는 멋들어진 로맨스가 된다.
▲화양연화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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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홍콩영화, 그 시절의 왕가위
또 기억할 만한 한 가지, 밀레니엄을 전후해 아시아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부상한 왕가위의 존재다. 그는 1994년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을, 6년 뒤인 2000년엔 <화양연화>를 발표한다. 이 작품군은 서로 다른 장르며 분위기에도 사랑의 일면을 비춘다는 점에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졌다. 놀라운 건 왕가위의 시선과 표현력이다. 오늘날까지 <중경삼림>은 사랑을 처음 시작한, 또 그 사랑을 잃어본 20대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는 명작으로 자리한다. <화양연화>는 삶이 가져오는 필연적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중년들에게 또한 큰 공감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동사서독>은? 이토록 세련되고 강렬한 무협영화의 중심에 남과 여가 마음을 트는 관계의 시작점과, 상실의 괴로움에 고통받는 끝이 담겼단 사실은 기록할 만하다. 대단한 멜로영화 못잖은 감흥을 안기는 이 같은 영화는 당대 왕가위 감독의 감성, 또 표현력이 얼마만큼 대단했는지를 알게끔 한다. 청년과 중장년, 그 모두에 통하는 감성을 단 한 명의 창작자가 짧은 시기에 표출한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 작품들은 가장 냉혹한 심판자인 시간의 세례를 건너 살아남지 않았나.
<화양연화>는 이번 특별판 개봉으로 무려 4만 명 가까운 관객을 추가로 모았다. 그중 상당수는 새로운 관객이 아니다. 왕가위와 지난 시대 홍콩영화, 그리고 그것과 통하는 감수성을 가진 한국의 오랜 영화팬들이다. 한국 극장의 위기론이 끊임없이 거론되는 상황이지만 좋은 영화는 이처럼 몇 번이고 저와 통하는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다. 예술의 가진 힘을 확인케 하는 영화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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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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