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은애하는 도적님아>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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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노비 천첩은 남편에게 법적으로 얽매이지 않았다. 행동 폭도 사노비 천첩에 비해 넓었다. 특히, 연애 문제에서 그랬다. 실제 인물 홍길동이 체포된 1500년에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고 그 뒤 중종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도 이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 이야기는 광해군시대 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온다. 홍길동 체포 당시의 임금인 연산군이 중종반정(1506)으로 폐위된 뒤에 남곤은 관찰사로 파견됐다. 그는 황해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일이 있다. <어우야담>이 말한 시기가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인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황해도 아니면 전라도인 그곳에서 관찰사 남곤은 어느 관기에게 푹 빠졌다. 그 관기와 함께 관청 객사 뜰을 거닐기도 하고, 관기의 집에 가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관기 집에 갈 때 관사 직원에게만 알리고 '도지사' 일정을 비밀로 했는데도, 관리들이 남곤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관기의 자택 앞에서 대기한 일도 있다.
남곤이 그 관기를 천첩으로 맞이한 것은 관찰사 직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간 뒤였다. 관기가 한양에서 별도의 주택에 거주한 것을 보면, 남곤이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뒤 남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술에 취해 측근과 함께 첩의 집에 들어갔다가 잘생긴 남자 하나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남곤은 누구냐고 추궁했다. 첩은 나를 그렇게도 못 믿느냐며 결백의 표시로 자기 손가락 하나에 자해를 가했다.
끔찍한 광경에 경악한 남곤은 '관기들이 두 마음을 갖는 것은 크게 책망할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첩을 나무랐다. 그런 뒤 이별을 고하고 낙향시켰다. 첩의 양다리 걸치기에 화난 게 아니라, 지나치고도 거짓된 결백 표시에 화가 났던 거다. 남곤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관기 천첩들 중에는 이런 식의 스캔들을 일으켜 남편의 속을 썩이는 이들이 많았다.
관노비 천첩은 사노비 천첩보다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남곤의 첩이 일으킨 스캔들도 그런 상황의 산물인 측면이 있다. 남곤을 배신한 첩이 사노비였다면, 그를 고향집으로 돌려보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노비였다면 남곤의 분노가 훨씬 강하게 표출됐을 수도 있다. 관기 출신인 그 첩은 그렇게 다룰 수 있는 상대방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노비 천첩의 행동 폭은 상대적으로 넓었다.
남편이 첩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관기들 중에는 이 구도를 뒤집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남자를 선택해 자신을 그 첩으로 공인시키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이 점은 연산군과 중종의 아버지인 성종이 받은 보고에서도 확인된다.
음력으로 성종 9년 11월 21일 자(양력 1478.12.14.) <성종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관기들이 오늘은 이 남자 집에서 자고 내일은 저 남자 집에서 자는 일이 많다'는 보고를 받았다. 관기들이 '동가식 서가숙'이 아니라 '동가숙 서가숙' 하는 실태를 보고 받은 것이다.
위 실록에 따르면, 그런 관기 중에는 자기 아이를 왕실이나 재상의 아이로 만들기 위해 '이 아이는 아무개의 아이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자신이 접촉하는 남자 중 하나를 자기 아이의 아버지로 지목했던 건데, 이런 일이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많이 발생해 임금에게도 보고가 들어갔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관기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후계자로 들이는 왕족이나 재상도 있다고 위 실록은 말한다. 남편이 첩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첩이 남편을 선택하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춘섬 같은 사노비 천첩들도 '첩이 남편을 선택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일이 있었지만, 주인집에 얽매인 사노비 천첩들이 일으킨 문제가 사회문제로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이런 일을 많이 만들어낸 사람들은 특정 남자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관기 출신 천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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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