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 스틸 이미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대화 상대이다. <슬픔의 삼각형>의 등장인물들이 보톡스로 '슬픔의 삼각형(미간 주름)'을 지우며 부조리한 문명 속에 안주하려 했다면, <직장상사 길들이기>의 린다는 야생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주름을 분노의 에너지로 치환한다.
<슬픔의 삼각형>의 마지막에서, 해변의 캡틴이 된 청소부 애비게일은 야야와 함께 산을 오르다 호화 리조트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한다. 그 순간이 영화의 완벽한 반전의 계기가 된다. 문명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보이지 않는 존재인 청소부로 전락할 애비게일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돌을 들어 야야를 살해하려 한다. 그리고 남자친구 칼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듯 숲을 미친 듯이 헤치며 달려간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여기서 더 나아간 파격적인 변주를 예고한다. 애비게일의 선택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우발적인 폭력이었다면, 린다는 자신의 지위를 상실할지도 모르는 구조(救助)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는 린다가 문명의 '엘리베이터'를 보고도 모른 척 지나칠 가능성, 혹은 브래들리를 영원히 자신의 '섬'에 가두기 위해 더 치밀한 함정을 파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레이미 감독의 장르적 광기는 이 지점에서 폭발해야 한다. 린다가 발견한 것이 리조트가 아니라 또 다른 기괴한 생존 게임의 시작일 수도 있고, 브래들리를 구원하는 척하며 그를 사회적으로 영원히 매장할 완벽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슬픔의 삼각형>이 인간의 위선을 관조적으로 폭로했다면,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그 전복의 상태를 끝까지 밀어붙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뒤에 남는 순수한 광기의 여러 갈래를 탐구한다. 열린 결말인 <슬픔의 삼각형>과 달리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닫힌 결말을 선보인다. 그런 결말이 납득할 만한 것인지에 관한 논의와 별개로 그 결말은 광기를 납득할 만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호모 사케르'와 'SEND HELP'
이 영화에서 가장 심오한 지점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개념을 현대 노동 환경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법질서에서 배제되어 누구든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었던 이 저주받은 존재는, 오늘날 거대 기업의 부품으로 전락해 언제든 대체 가능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린다는 회사에서 이미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한 호모 사케르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무인도라는 예외 상태가 발생하자,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브래들리가 거꾸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한다. 전복이 통쾌하긴 하지만 호모 사케르는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만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전언이 통렬하다.
영화 원제인 'SEND HELP'는 이 대목에서 중의성을 드러낸다. 단순히 도움을 보내달라는 '행위'의 묘사를 넘어, 모래사장에 거대하게 새겨진 '구조 신호(문구)' 그 자체로서 기능한다. 이 짧고 강렬한 문구는 누구의 시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무시당하던 린다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던 구조 요청이었다가, 야생의 여왕이 된 린다 아래서 무너져가는 브래들리에게 절박한 생존의 신호가 된다. 가장 문제적 해석은, 이 문구를 외부를 향한 요청이 아니라 이 뒤틀린 지배 유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제물(Help)을 보내달라는 린다의 광기 어린 초대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구조되어야 할 것은 섬에 갇힌 육체가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의 일그러진 마음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껍질을 깨고 나온 서바이벌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 우리 삶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린다가 거머쥔 성공은 달콤하지만, 그 끝에 남은 것은 또 다른 지배와 종속의 굴레이기도 하다. 레이미 감독은 이 뒤틀린 상상력을 통해,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출근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잔혹하면서도 짜릿한 판타지를 줄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지도 모른다. "내 '슬픔의 삼각형'을 지워줄 진짜 구조 신호는 어디에 있는가?" 더불어 자신이 정말로 구조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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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