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세계사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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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두 번째 공모자는 '교육자'들이었다. 이들은 유대인 학살 등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더 악랄하고 위험한 '사상 개조'에 앞장선 인물들이었다.
독일의 학교들은 나치 사상의 교육장으로 전락했다. 나치 정권은 교실 환경을 나치화로 바꾸어놓았다. 교실에는 히틀러의 초상화가 걸렸고 수업 시작 전에는 학생들로 하여금 히틀러에게 경례 하도록 했다. 유대인이나 반나치 성향의 교사들은 모두 축출당했다. 1930년대 독일 전체 공립학교 교사의 97%가 나치당 소속이었다. 나치 정권의 교육자들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의 패인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 때문이었다며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히틀러는 유대인 혐오의 정당성을 위하여 혈통을 내세웠다. 히틀러는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백인을 '아리아인(고귀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아리아인은 세계에서 가진 우월한 인종이며, 독일인이 곧 아리안의 대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 등은 열등한 인종으로 서열화했고 유대인의 혈통, 외모를 문제 삼으며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나치 정권의 부역자였던 교육자들에게 배우며 성장한 독일의 어린 세대는 그렇게 나치의 세계관과 유대인 혐오를 세뇌당하면서 자랐다.
세 번째 공모자는 '행정가'들이었다. 폭주하는 나치 정권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아예 완전히 제거한다는 '유대인 절멸정책'을 추진했다. 그들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학살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지에 폐쇄구역인 '게토'를 건설하고 포획한 유대인들을 강제로 몰아넣었다. 대규모 학살을 위한 중간 단계였다.
1940년 나치 행정가들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건립하고 유대인들을 끌어다가 잔혹한 구타와 강제 노동, 학살을 자행했다. 나치의 핵심 행정가로 '데스크 위의 학살자'로 꼽혔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러한 홀로코스트 집행을 행정적으로 총괄했던 인물이다. 아이히만은 유럽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모아놓기 위하여 유럽 철도망을 활용한 '유대인 수송 열차'를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또한 나치 행정가는 이렇게 끌려온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대량 학살 시스템을 구축했다. 처음에는 총살을 집행했으나 독일군들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며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자, 나치 행정가들이 찾아낸 대안은 '가스실'이었다. 나치는 수용소에 가스실을 설치하고 유대인들을 가두고 독성화합물을 배출해 질식사시키는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가스실 도입으로 유대인 대학살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의료인'들도 나치의 범죄에 동참했다. 나치는 병력 손실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나치 친위대 의사였던 지그문트 라셔는 군사목적 생체실험에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수용자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실험을 위하여 인간이 견디기 힘든 각종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음의 천사'로 불렸던 요제프 멩겔레라는 인물은 인종차별에 기반한 생체실험을 단행했다. 그는 쌍둥이 출산의 원인을 알아내 아리아인의 출산율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유대인 쌍둥이 아이들을 데려와 각종 약물주입과 신체 변형 실험 등을 단행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살해당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칼 클라우베르트는 열등한 인종의 번식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가임기의 유대인 여성들에게 마취도 없이 강제 불임 수술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들의 행위는 실제 의학발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생명을 살려야 할 본분을 지닌 의사들이 인간을 도구로 삼은 끔찍한 범죄에 불과했다.
히틀러의 충격적인 마지막 공모자는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나치에 협력하고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동족을 학살하는 데 동참했다. 나치는 게토 구역에 '유대인 위원회'라는 조직을 설치하고 자신들에 협력하는 이들을 등용하여 다수의 유대인을 통제했다. 나치에 협력한 유대인들은 나치 정권이 부여한 할당량에 따라 동족을 체포하거나 수용소로 보낼 인원을 선별하는 데 참여했다.
강제 수용소 내에서도 나치에 협력한 유대인들이 존재했다. '카포'로 불린 유대인들은 현장 감독의 역할을 맡아 같은 유대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해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직접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가스실에 보낼 약자들을 선발했다.
또한 '존더 코만도'로 불린 유대인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가스실 시신 처리와 관련된 업무를 강요받았다. 나치는 학살의 증거를 감추기 위해 존더코만도 역시 주기적으로 살해하고 인원을 교체했다. 살아남은 존더코만도 역시 동족의 시신을 처리했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평생을 살았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과 유럽 각국은 나치 전범뿐 아니라 수용소에서 잔혹 행위에 가담한 유대인들도 처벌 대상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피해자인지 같은 민족을 배신한 가해자인지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이탈리아의 작가 프리모 레비는 회고록 <가라앉은 자와 구조한 자>에서 "수용소의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두 블록으로 나눌 수 없다. 죄수 기능자라는 이 혼합 계층은 회색지대에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근본적인 책임은 결국 범죄를 주도한 나치 수용소 체제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레비 본인 역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자살했다.
강제 수용소의 해방을 기념한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결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거대한 비극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와 관련해 여러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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