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즈데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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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죽음을 형상화하고 그 역할을 중단함으로써 관객 앞에 죽음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죽음이 가져오는 결과는 그저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할 때는 좀처럼 와 닿지 않는 것들이 아닌가. 그러나 죽음의 파업으로 목 없는 새가 창을 두드리고 도살된 좀비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면, 마땅히 죽어야 할 이가 죽지 못해 신음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마땅한 일을 소화하는 앵무새 앞에서 그를 비난하고 저항하는 일의 덧없음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상기할 때에야 비로소 현명한 삶이 가능하다는 옛 격언도 이와 무관치 않을 테다.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죽음은 삶의 일부다. 죽음이 이 세계의 필연적 요소이며 인간 또한 세계의 일부인 때문이다. 죽음을 외면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죽음과 삶을 대립된 관계로 이해하고 삶에 집착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대립항이 아닌 일부인 까닭에 삶에 집착하는 태도가 도리어 삶의 진면목을 오해하게 만든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야 삶 또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배제한다면 인간은 삶 자체로부터도 소외된다. <튜즈데이>가 보이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앵무새가 나타나고 그의 방문이 의미하는 바를 외면하려 애쓸수록 드러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야기다.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인간은 삶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닿을 수 없었을 이해 또한 튜즈데이와 그 엄마 사이에 싹튼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나쁜 것일까. 죽음이 오기까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리하여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못난 인간들이 나쁜 것이 아닌가.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 화요일을 뜻하는 '튜즈데이'란 것도 성찰의 지점이 된다. 화요일, 어쩌면 일주일 중 가장 특색 없는 날이 아닌가.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있는 날을 소중히 하라, 그날이 가장 특별한 순간일 수 있으니. 부디 영화 <튜즈데이>가, 또 이 글이 당신의 일상을 특별하게 하길 바란다.
▲튜즈데이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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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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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앵무새의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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