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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앵무새의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255] <튜즈데이>

26.01.18 16:24최종업데이트26.01.1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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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 며칠간 머문 적이 있다. 자동차 운반선 항해사로 엘베강을 거슬러 도시 복판에 자리한 항구에 배를 대고 내렸을 때다. 독일연방 내에서도 특별한 도시, 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라 불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도시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함부르크는 오랫동안 가보고 싶던 도시였다. 그건 이 도시가 가진 특별한 역사성, 한자동맹이라 불리는 무역공동체, 그 근간이 되는 길드 중심의 상인들의 조합이 빚어낸 자유롭고 실용적이며 독립적인 역사를 뒤따라 걷기 위함이었다. 그저 그뿐 만은 아니었다. 함부르크의 자유로운 풍토는 독일연방의 뛰어난 정치가를 여럿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헬무트 슈미트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빌리 브란트에 이어 독일 총리를 역임했고, 독일의 경제성장과 함께 동방정책을 계승해 독일이 통일에 이르는 데 역할을 다한다.

함부르크에서 며칠을 보낼 수 있게 된 나는 우선 헬무트 슈미트의 무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묻힌 곳은 함부르크의 올스도르프 공원묘지, 1887년 조성된 당시 기준 세계 최대 정원식 묘지였다. 연중 개방되는 이 묘지는 면적이 무려 120만 평에 무덤이 23만 개가 훌쩍 넘는다고. 묘지가 어찌나 크던지 종일 걸어도 단 몇 구역밖에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통상 우리가 묘지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우중충함, 또 어둡고 슬픈 분위기는 이곳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묘지는 찬란했고 사슴과 온갖 새들이 자유롭게 거닐었으며 곳곳에 심긴 나무와 꽃들이 맡기 좋은 향내를 풍겼다. 여기저기 놓인 예술작품은 이 묘지를 정원이라 하는 이유를 알게끔 했다.

죽음과 마주할 때

튜즈데이 스틸컷
튜즈데이스틸컷팝엔터테인먼트

그때야 알았다. 내가, 그리고 한국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거나 유일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그로부터 수많은 나라 많은 무덤들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심지어 같은 유학 문화권 안에서도 한국만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유독 이상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어느 문화권보다도 유학이 죽음을 가깝게 여기고 선조를 중시하여 위패를 통상 집 안에 모시고 일터 근처에 무덤을 두도록 하는 반면, 다른 유학 기반 국가들과 달리 한국 만큼은 무덤은 저 멀리 시골에 두고 위패는 아예 관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화장 문화가 기본으로 자리한 일본조차도 유골함을 관리하는 문화가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달 개봉한 신작 <튜즈데이>는 죽음을 다룬다. 그저 주된 소재가 죽음일 뿐 아니라 아예 죽음을 시각화한 존재가 주요하게 등장하기까지 한다. 영화는 마치 앵무새처럼 생긴 거대한 새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날아가 죽음의 사자처럼 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떤 이는 새의 방문을 거부하고 그 대가리에 침을 퉤 뱉기도 한다. 무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그를 반기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쨌건 간에 새는 한 쪽 날개를 쳐들고 슥 사람들을 훑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영원한 끝이 도래한다.

내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

튜즈데이 스틸컷
튜즈데이스틸컷팝엔터테인먼트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을지 알 수 없는 앵무새의 날갯짓이다. 영화는 그가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를 낯선 만남과 마주하며 빚어지는 이야기다. 튜즈데이(롤라 페티크루 분)는 깊은 병을 앓고 있는 10대 소녀다. 마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처럼 산소통을 곁에 두고 사는 모양이 폐질환을 앓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가정 방문 간호사가 목욕물을 받는 사이 잠시 마당에 홀로 있던 튜즈데이 앞에 날아든 앵무새다. 관객은 직감한다. 튜즈데이가 곧 죽게 되리란 걸.

앵무새를 맞이한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튜즈데이도 직감한다. 제게 때가 왔다는 걸.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제 운명을 납득할 수 없다. 왜 아닐까. 이제 고작 10대 중반의 나이, 그마저도 대부분의 시간을 산소통을 곁에 두고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마저 지금은 나가 일하고 있는 때다. 홀로 이렇게 죽음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억울해도 너무 억울하다.

후에 앵무새가 말하듯이 튜즈데이는 특별하다. 다른 이가 흔히 택하는 그렇고 그런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튜즈데이의 반응이 앵무새에게 그대로 먹혀든다. 그렇게 튜즈데이는 당장의 죽음을 피한다. 영화는 그로부터 앵무새와 튜즈데이가 보내는 얼마간의 이야기가 된다.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드는 업이 멈추며 발생하는 온갖 문제도 뒤따른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란 것을

튜즈데이 스틸컷
튜즈데이스틸컷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죽음을 형상화하고 그 역할을 중단함으로써 관객 앞에 죽음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죽음이 가져오는 결과는 그저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할 때는 좀처럼 와 닿지 않는 것들이 아닌가. 그러나 죽음의 파업으로 목 없는 새가 창을 두드리고 도살된 좀비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면, 마땅히 죽어야 할 이가 죽지 못해 신음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마땅한 일을 소화하는 앵무새 앞에서 그를 비난하고 저항하는 일의 덧없음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상기할 때에야 비로소 현명한 삶이 가능하다는 옛 격언도 이와 무관치 않을 테다.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죽음은 삶의 일부다. 죽음이 이 세계의 필연적 요소이며 인간 또한 세계의 일부인 때문이다. 죽음을 외면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죽음과 삶을 대립된 관계로 이해하고 삶에 집착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대립항이 아닌 일부인 까닭에 삶에 집착하는 태도가 도리어 삶의 진면목을 오해하게 만든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야 삶 또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배제한다면 인간은 삶 자체로부터도 소외된다. <튜즈데이>가 보이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앵무새가 나타나고 그의 방문이 의미하는 바를 외면하려 애쓸수록 드러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야기다.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인간은 삶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닿을 수 없었을 이해 또한 튜즈데이와 그 엄마 사이에 싹튼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나쁜 것일까. 죽음이 오기까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리하여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못난 인간들이 나쁜 것이 아닌가.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 화요일을 뜻하는 '튜즈데이'란 것도 성찰의 지점이 된다. 화요일, 어쩌면 일주일 중 가장 특색 없는 날이 아닌가.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있는 날을 소중히 하라, 그날이 가장 특별한 순간일 수 있으니. 부디 영화 <튜즈데이>가, 또 이 글이 당신의 일상을 특별하게 하길 바란다.

튜즈데이 포스터
튜즈데이포스터팝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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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