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홍수> 스틸컷
넷플릭스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는 거대한 물난리의 영화라기보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인간 감정 하나를 붙잡으려는 이야기다. 스포일러를 전제하고 말하자면 화면 가득 차오르는 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모든 재난이 이미 수만 번 되감겨 재생된 실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뉴스 속보에서 시작한다. 소행성 충돌이 가져온 전 세계를 집어삼킬 초대형 해일은 인류 문명의 붕괴를 초래했다. 아파트 3층까지 물이 차오른 걸 보며 주인공 안나는 아들 자인을 끌고 위로 올라간다. 물은 아래에서 차오르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위에서부터 조금씩 부서져 내린다.
먼저 무너지는 것들
재난의 얼굴을 한 실험실 중반부에 이르면 관객은 서서히 불편한 기시감을 느낀다. 이 우연들은 너무 계산적이고 이 죽음들은 너무 '기능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절묘한 타이밍의 구조, 딱 맞춰 등장하는 인물, 이상할 정도로 특정 선택만을 압박하는 상황들이 그렇다. 마치 누군가 옆에서 마우스를 쥐고 여러 번 시도해보는 게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영화는 마스크를 벗는다. 인류는 이미 멸종했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아파트, 이 가족, 이 홍수는 모두 우주 기지에서 인공지능이 돌리는 시뮬레이션이다. 단지 남아 있는 것은 거대한 데이터, 그리고 인간이 남기고 간 감정의 기록 뿐이다.
AI는 이 데이터를 가지고 완전한 감정 모델을 만들기 위해 수만 번의 상황을 반복 재생한다. 그중 가장 집요하게 관찰되는 장면은 물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 엄마가 아이를 위해 무엇을 선택하는가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2시간 남짓의 서사가 사실상 2만 번째 실험 쯤 되는 하나의 루프다. 이전의 수많은 시도에서 안나는 다른 선택들을 해온 것으로 암시된다. 아이를 놓치기도 하고, 둘 다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둘 다 실패하기도 하고, 타인의 생존을 위해 양보하기도 한다.
마지막 회차에서 옥상 근처까지 몰린 물 속에서 안나는 자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쪽으로 결정한다. 이 선택은 더 이상 계산할 수 없어서 내려버리는 직감의 선택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 순간을 과장되게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짧고 허무하게 지나간다. 그러나 그 짧은 틈을 위해 수만 번의 실패가 있었고 AI는 그동안 모아온 데이터 위에 이 마지막 조각을 올려놓으며 실험을 종료한다.
어쩌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의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반복이라 해도 단 한 번의 선택이 전체 이야기를 바꾸는 날이 온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평범한 일상과 수많은 망설임 끝에 어느 날 우리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결정을 해버리고 그 결정 이후의 삶은 이전과 다른 강 줄기를 타고 흘러간다.
AI는 방대한 시뮬레이션 로그와 함께 인간 감정 모델을 완성했다고 판단한다. 슬픔, 두려움, 이기심, 혐오, 연민, 그리고 끝끝내 자신을 밀어내고 타인을 선택하는 어떤 감정 말이다. 인류가 남긴 건 더 이상 도시도 기술도 국가도 아니다. 방금 막 사라진 한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가 인류 문명의 유산으로 압축된다.
이후 AI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합성인간을 만들고, 지구로 작은 모듈들을 하나씩 쏘아 보낸다. 표면적으로는 멸망 이후의 재건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보다 보면 인간의 감정을 닮은 새로운 존재들에게 이야기를 이어 쓰게 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면 가득 떠다니는 작은 캡슐들은 마치 타임캡슐 같다. 그 안에는 유전자보다 더 중요한 게 들어 있다. 삶 전체를 통과해 나온 하나의 감정 패턴, 하나의 서사 구조다.
내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대홍수>를 재난 영화로만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 수 있다. 물이 도시를 덮치는 장면의 스케일, 실제 재난 대응의 디테일, 캐릭터들의 현실감 있는 행동 같은 요소들은 분명 아쉬운 지점들이 보인다. 대신 이 영화는 거대한 물을 배경으로 한 자기 서사의 실험장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인공지능이 재난을 돌려보며 궁금해 하는 건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살아남을까가 아니다. 이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감정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만 번의 스토리를 돌려본 끝에 한 엄마의 희생이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하나에 도달한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끝없이 스크롤 되는 뉴스, 무한히 업데이트되는 영상, 되돌려보기 버튼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반복 재생되지만 정작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점점 뒤로 밀린다. 이 영화 속 AI가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하나의 서사를 붙잡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수많은 선택과 방황 끝에 '그래도 이 이야기를 내 이야기라고 부르겠다'라고 마음먹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대홍수>는 그 순간을 물로 가득 찬 복도와 옥상 그리고 아주 작은 캡슐들 위에 옮겨 놓는다. 대홍수 이후에 남는 것은 거대한 방주가 아니라 작고 사소해 보이는 한 사람의 선택, 한 번의 포기, 한 번의 껴안음이다. 그리고 그 미세한 감정의 흔적이 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흘러갈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이 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