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3부작 <청년 김대건>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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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에서 이달 24일부터 26일까지 방영한 <청년 김대건>의 주인공인 김대건 신부(1821~1846)는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목격자다. 그는 세계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된 아편전쟁 강화조약 조인식을 난징(남경) 현장에서 목격했다. 이 장면이 <청년 김대건>에서 비중 있게 묘사됐다.
조선인인 그가 청나라와 영국의 난징조약 체결 현장에 가게 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추적하다 보면, 19세기에 한국 가톨릭이 겪은 비극에 대해 조선 정부뿐 아니라 서양제국주의도 책임이 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15세 때인 1836년 12월 한양을 떠난 김대건은 1837년 6월부터 1842년 2월까지 마카오에서 공부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조선교구 신학교에서 중등과정과 철학 및 신학 과정을 이수했다.
제1차 아편전쟁이 막바지에 도달한 1842년 2월 15일이었다. 이날 김대건은 55세 된 프랑스의 장바티스트 세실(1787~1873) 해군제독과 함께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에 탑승하고 16일부터 항해를 시작했다. 드라마 <청년 김대건>의 제1회 끝부분은 신학교 관계자가 김대건(윤시윤 분) 등을 모아놓고 "마카오에 정박 중인 불란서 극동함대의 사령관인 세실 함장이 어제 다녀갔습니다"라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세실 함장이 프리깃함인 에리곤호를 타고 상해 쪽으로 북상하면서 아편전쟁 상황을 살핀 후, 조선에 가서 통상수교를 정식으로 요청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가 우리 신학생 중 1명을 통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9세기에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이 통상을 요구했던 방식은 흔히 함포외교로 불린다. 군함에서 대포를 쏘아대며 위협을 가한 뒤 자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통상조약을 강요했다. 그런 목적으로 조선을 찾아가는 길에 조선 신학생을 통역관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교회사 연구> 2021년 제59집에 실린 도진순(창원대)·남지우(대만대) 교수의 논문 '1842년 김대건의 에리곤호 항해와 아편전쟁'에 따르면, 2월 16일 마카오를 출발해 동남쪽인 필리핀 마닐라에 2월 20일부터 체류한 세실과 김대건 등은 4월 21일 북상을 개시했다.
4월 29일 대만 인근에 도착한 에리곤호는 대만해협을 통과한 뒤, 상하이 동남쪽인 저우산(주산)에서 5월 11일부터 6월 21일까지 머물다가 6월 23일에 양자강 입구인 우송(오송)에 도착했다. 여기서 하선한 세실과 김대건 등은 정크선을 타고 난징으로 이동했다.
세실 제독은 김대건 등을 데리고 청·영의 난징조약 체결 장소로 향했다. 유럽 최강국이 아시아 최강국을 굴복시키고 동서양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세계사적 현장에 조선 통역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청년 김대건>의 제2부 앞부분은 양자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Cornwallis) 선상에서 난징조약이 체결되고, 김대건과 세실 제독이 참관인 자격으로 지켜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영국 측이 '좀더 빨리 체결했더라면 피해가 줄었을 것 아니냐?'라며 핀잔을 주고, 김대건과 세실 제독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제독은 그 자리에 참석할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그의 통역인 김대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참관이 가능했던 것은 세실 제독이 영국 전권대표 헨리 포팅거(Henry Pottinger, 1789~1856)과 안면을 터두었기 때문이다.
도진순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인 '1842년 김대건의 남경조약 조인식 참관과 보고'(<한국근현대사연구> 2021년 제98집)는 "세실의 참관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며 김대건을 대동한 세실이 조인식장에 불청객으로 나타나 어색한 환영을 받는 장면을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불청객으로 조인식 현장에 나타나 수상한 환영을 받았다. 세실의 참관은 매우 이례적이지만, 그의 강력한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1842년 2월 16일 조제프 암브로이즈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을 에리곤에 태우고 마카오에서 출발하기 한 달여 전인 1842년 정초, 홍콩에서 영국의 전권대표 헨리 포팅거를 두 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영국군은 아편전쟁의 최후 단계로 장강 하구 전투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포팅거는 아편전쟁에 중립적인 세실의 입장에 호의적이었고, 세실은 이 만남을 통해서 영국군의 전략적 방침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인연에 힘입어 1842년 8월 세실은 김대건을 대동하고 영국군이 통제하고 있는 장강을 거슬러 남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역사적 순간을 두 눈으로 목격한 김대건
조인식 참관 뒤 김대건이 남긴 기록에는 영국 대표에 대한 언급은 없고 청나라 대표단에 관한 언급만 있다. 위 논문은 "이것은 세실이 영국인들과는 직접 소통이 가능하여 김대건의 도움이 필요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한다. 세실이 김대건을 대동한 것은 프랑스의 침략 대상인 청나라 쪽의 분위기를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김대건은 역사적 순간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됐다.
그런데 조인식을 참관한 뒤 세실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조선에 가서 통상조약을 요구한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마닐라로 돌아갔다. 원래 계획대로 항해가 계속됐다면, 김대건은 프랑스군의 선두에서 조선을 압박하는 대열에 설 수도 있었다. 세실의 계획 변경으로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함대와 헤어진 김대건은 중국대륙을 통과해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845년 1월에 조선으로 들어갔다. 그해 4월 30일 제물포에서 출국한 그는 8월 17일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재입국했다.
세실 제독은 김대건과 헤어지고 2년 뒤인 1846년에 클레오파트르호를 타고 충청도 해역에 나타나 조선 정부를 압박하고 돌아갔다. 이 사실은 헌종 12년 7월 3일자 <헌종실록>에 수록돼 있다. 이 날은 양력으로 1846년 8월 24일이다.
김대건이 체포된 날은 그해 6월 5일이고, 처형된 날은 9월 16일이다. 세실이 다녀간 뒤 조정에서 김대건과 세실의 관계가 거론됐다. 이때는 8월 24일이다. 위의 도진순·남지우 논문은 "(김대건이) 서둘러 처형된 것도 세실과의 인연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세실을 수행한 일은 김대건이 세계사적 사건을 목격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것은 위험한 동행이었다. 1842년에 세실과 헤어짐으로써 피했던 그 위험은 그가 체포된 1846년에 세실이 방한하는 바람에 결국 현실화됐다.
김대건의 비극적 순교는 조선 정부의 부당한 박해 때문에 생겼지만, 조선으로 향하는 프랑스 해군이 그를 통역으로 앞세운 데도 적지 않게 기인한다. 자생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발전시킨 조선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한 것은 조선인들의 신앙에 서양제국주의가 끼어든 데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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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