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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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빈이 첩이 된 것은 영조가 세제가 되기 이전이었다. 이들은 첩과 남편의 관계보다는 절친 관계에 훨씬 가까웠다. 이정빈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뒤인 1722년 1월 6일(음 11.19)에 영조가 작성한 '소훈이씨제문'에 따르면, 이정빈이 영조의 허물을 지적하면 영조는 그 말을 잘 따랐다고 한다.
영조는 그의 충고가 자신을 감복시켰다고 회고했다. 영조는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 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고 썼다. 가족보다는 친구가 됐으면 더 좋았을 관계였던 것이다.
이정빈이 영조의 아들을 낳은 것은 영조가 세제가 되기 전인 1719년 4월 4일(음 2.15)이다. 영조의 장남인 이 아들이 훗날 영조의 후계자로 책봉됐다가 아홉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효장세자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 임금 때 진종으로 추존됐다. 정조는 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됐다. '임금의 아들이어야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정조의 법적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임금으로 추존하는 것이 이 시대에서는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이정빈은 임금을 낳은 세제첩이 됐다.
이정빈은 영조의 장남을 낳은 지 3년도 안 되는 1722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세제첩이 죽은 이 사건은 얼마 안 가 정치적 이슈로 비화됐다. 독살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세제첩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후에 정치적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게 됐다.
경종 임금의 어전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그해 6월 27일이다. 이날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경종 2년 5월 14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세제빈 서씨(훗날의 정성왕후)의 동생인 서덕수가 궁중 사람들을 이용해 세제첩 이정빈을 독살했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다.
이 일은 영조의 우군이자 야당인 노론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으로 정리됐다. 노론당의 경쟁세력이자 집권당인 소론당은 노론이 서덕수 등과 함께 궁중 사람들을 이용해 세제빈을 독살한 일이라고 이 사건을 규정했다.
후계자를 낳지 못한 경종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소론의 지지를 받고,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왕세제인 영조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노론의 지지를 받는 불안정한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제첩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집권당은 노론과 세제빈 측이 세제첩을 죽였다는 쪽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소론정권은 경종 임금의 교서를 통해 이런 수사 결과를 공식화했다.
세제와 열애하던 이정빈은 이로써 보수세력과 세제빈 측의 공격을 받아 젊은 나이에 독살된 여인으로 공식화됐다. 정쟁과 치정의 이중적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고 이듬해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그 결론은 뒤집어졌다. 노론정권은 전 정권의 수사 결과가 터무니없다며 이를 독살 사건이 아닌 조작사건으로 재규정했다. 노론당은 소론당이 허위로 독살사건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영조도 이 결론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노론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영조의 부인인 정성왕후도 짐을 덜게 됐다.
영조 이후의 임금들은 영조의 직계혈통에서 나왔다. 영조의 후손들은 노론당 계열이 장기집권하는 속에서 왕위를 이어갔다. 그래서 1725년의 결론이 뒤집어지기는 힘들었다. 젊은 시절의 영조 임금과 우정 같은 사랑을 나눴던 이정빈은 이로 인해 그냥 몸이 아파서 죽은 인물로 기억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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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