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 스틸
㈜트리플픽쳐스
문일병은 군경 중 입체성을 드러내는 독보적 캐릭터다. 그가 속한 소부대는 나치독일이 양민학살을 위해 단일목적으로 조직한 특수임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연상케 한다. 이들은 숫자를 세어가며 민간인을 죽이고 기록해 보고한다. 기계적인 효율성과 원초적 증오가 혼재된 이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죽창을 들고, 어떤 동정심도 없이 남녀노소 공평(?)하게 처단한다. '빨갱이 사냥'의 쾌감과 군정의 '뒷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대를 통솔하는 '박중사'는 학살기계의 중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유능한 관료 자체이던 수용소장 회스와 달리 그는 분노와 복수심에 가득 차 있지만, 그의 과거는 설명되지 않는다. < 1987 >에서 희대의 '빌런' 치안감이 고문 와중에 자신의 이념적 투철함을 설파하는 인상적인 장면과 비교해 아쉬운 지점이다. 유일한 단서는 문일병이 가책을 달래기 위해 열심히 읊는 기도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전임무에 참여한 건 문일병이 공산당에 대한 원한은 동일하기 때문일 테다.
박중사의 부대는 실제 역사 속 '서북청년단' 역할임을 유추할 수 있다. 북한에서 재산과 가족을 잃고 쫓겨온 이들이 사적 원한과 반공주의가 결합된 상태로 군경에 응모하고 제주도에 파견된다. 공사 구분 없이 강렬한 적개심만 남은 이들에게 제어장치가 없다면 참극은 피할 수 없다. 오히려 군경은 그런 성향을 부추기고 방관했다. 그런 시각을 제작진은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그 폭력성을 이용해 효율적인 진압을 꾀한 셈이다. 그들 중 일부가 제주도에 눌러앉아 유지가 되고 기득권을 형성한 건 4.3이 과거로만 그치지 않는 현실로 환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산부대의 민간인 살상은 표현은 되지만, 그 비중은 덜하다. 기계적 비례로 따져도 훨씬 규모가 작았으니까. 영화가 취한 4.3에 대한 시각을 다시금 확인하는 측면인 셈이다. 외지인이 대부분인 군경에 비해 현지 주민 간의 동질감도 작용해 그들의 민폐는 부차적으로 다뤄진다. 물론 부질없는 전력 차이, 이념에 경도된 외골수 시각이 피할 수 있던 비극을 부추긴 건 굳이 부정하지 않는 시선이다.
살아남기 위한 분투가 세상의 광기에 삼켜질 때
홀로코스트 문학을 언급할 때 항상 거론되는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언급하곤 했다. 실제로 생존자는 극히 드물지만 존재하긴 했는데 무슨 말일까? 그는 과거의 대량학살과 나치독일의 그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그저 편견에 의해 그 많은 인명을 근대 문명의 합리성을 총동원해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공장'을 가동한 게 어떻게 인간성 상실과 끝나지 않은 PTSD로 남았는가 설명하기 위해 비유한 것이다. 작가 역시 끝내 정신적 고통을 평생 치유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끝내고 만다. 그는 가라앉는 아우슈비츠 호에서 영원히 탈출하지 못한 셈이다.
<한란>은 4.3의 비극을 그와 동일하게 다룬다. 복잡한 이념 대립을 초월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민초들의 살아나기 위한 사투를 표현하는 게 영화의 목표다. 과거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도록 영화 내내 자막을 다는 수고를 감수하며 '제주어'로 대화가 이뤄진다. 김향기를 포함 대부분 배우가 특훈을 받아가며 사라져가는 고어를 숙지했다. 잔혹한 학살극은 실제 밝혀진 사실과 대중문화 유산을 이것저것 조합해 성실하게 조립한다. 관련 문학이나 영상을 자주 접한 이들이라면 쉽게 납득할 내용이다.
<한란>은 대중영화 화법을 취하지만, 역사적 비극을 다루기 위한 시대정신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영화의 뜻밖의, 꽤나 당혹스런 결말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태도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70여 년이 훌쩍 지난 현재, 여전히 강정마을과 2공항 논란이 그치지 않는 제주의 풍경과 비극을 추모하는 묘역의 환기는 그런 의도와 직통한다. 개인의 분투를 조롱하듯 짓밟는 거대하고 사악한 권능을 상기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는 비록 의욕과 비교해 종종 헐겁거나 상투적인 순간을 자주 노출하지만, 가야 할 방향은 잃지 않는다.
<작품정보>
한란
Hallan
2025 한국 시대극, 드라마
2025.11.26. 개봉 118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 하명미
츌연 김향기 김민채, 황정남, 김원준, 최승준, 김다흰,
강채영, 강명주, 장재웅 강구하
최현진, 양소민
특별출연 서영주
제작 웬에버스튜디오, 언제라도(제주)
제공 웬에버스튜디오
공동제공/배급 ㈜트리플픽쳐스 [IG],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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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