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일 안무가의 무용 신작 〈 XXX 〉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켜진다. 워밍업을 끝내고 본격적인 서막을 올린다.
'챕터1 귀신'
세 대의 스크린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이 등장해 해당 제목 아래 해설을 곁들인다. '키스(kiss)'에 대한 생물학적 정의를 자막으로 설명한다.
"칼로리 소모되고, 도파민이 생성된다…"
한 남자가 막대 사탕을 꺼내 들자, 두 사람은 그것의 양면을 격렬하게 혀로 교차해 핥는다. 그들은 사탕을 사이로 다소 격정적인 키스를 퍼붓는다.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를 분해하는 실험처럼, 이 장면은 관객의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동작들은 예상 밖이다. 이질적인 외투 옷을 벗고, 일상의 루틴을 흉내내듯 익숙하다.
"아침에 밥을 먹고, 이를 닦고, 다시 잠을 자는…"
여느 일상생활 속에 루틴하게 흐르는 동작의 반복들을 묘사한다.
"이것은 인생의 의미야."
무용수의 입술에서 내뱉은 문장은 삶의 이중적인 면을 풍자하듯 공허하게 흐른다.
0과 1 사이, 존재와 부재의 간극을 춤추다
다음 챕터에서는 영상에 숫자 0과 1이 번갈아 나타났다. 작품은 이 단순한 이분법적 기호들에 '존재와 부재'의 양립되는 '대립'을 담는 듯했다. 어쩌면 생과 사, 시작과 끝, 연결과 단절, 일상과 특별함 등 다양한 반대 지표를 내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0과 1 사이의 공백이 바로 그가 춤추는 무대의 간극이다. 이 공연은 분명 춤으로 포장된 무용이지만, 동시에 '존재 실험'으로 보인다. 앞선 안무가의, 관객의, 그리고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이것이 춤인지 전시인지 알 수 없는 궁금증만 되풀이된다.
XXX라는 기호, 금기와 가능성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세 번째 챕터가 시작된다. 이번 공연의 제목인 'XXX'가 본격 등장한다. 무슨 의미일까. 모두가 예상했듯 제작진은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해석을 나열한다. 매스 미디어에서 다뤄온 'XXX'에 대한 해석들이 자막으로 흐른다. 아마 이 단어에 대한 세상의 해석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XXX 같은 놈들..", "You FXXX"
비난과 조롱, 사회적 낙인, 온갖 욕설들이 한동안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게 춤이야?"라는 문장이 잠시 화면을 스쳤다. 그것은 누군가의 냉소이자, 관객의 내면에서 울리는 질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무용 공연의 한계에서 벗어난 이질감이 가득 채워진 작품이다.
"이게 춤인가?"
0에서 정한 질문에 대한 정답으로 볼 때, 어쩌면 이것은 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정한 해석이 과연 정답일까. 그것이 춤에 대한 정의에서 정답인지 확신하냐고 되묻고 싶다. 춤의 정의는 누가 정한 것인가. 다른 의미에서 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무대 위에서 무용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를 둘러싼 이미지와 사운드가 움직였다. 언론의 언어와 사회의 시선 속에서 '몸'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 그는 몸을 매개로,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 쓰려 했다. 이 무대에서 'XXX'는 금기이지만, 어쩌면 미지에 대한 가능성일수도 있지 않은가.
행진과 고백, 삶과 죽음의 호흡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흘러나올 때, 그들은 웃으며 행진했고, 이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다 가진 너일 테니까. 내 숨이 다한데도." 그 가사는 삶과 죽음, 사랑과 소멸의 경계를 넘나들며 울렸다. 그들의 춤은 삶과 죽음의 중간 어딘가에서 끝내 멈추지 않는 호흡처럼 이어졌다.
노란빛이 점점 옅어질 무렵, 귀에 익숙한 팝송 'Only You'가 울려 퍼졌다. 두 남자가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췄다. 그들의 복장은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중성의 형태였다. 남성의 외형을 갖추었지만 여성의 섬세함이 스며 있었고,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무대는 다시 긴장으로 가득찼다.
공연이 끝난 뒤, 조명이 꺼졌고, 노란빛의 잔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극장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손뼉을 치려다 멈췄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은 공연의 마지막 대사처럼 깊고 길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패의 미학, 생존의 윤리
▲정찬일 안무가의 무용 신작 〈 XXX 〉 관객과의 대화
이필립
정찬일 안무가의〈 XXX 〉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를 매개로 한 철학적 실험이다. 그는 전시 작가로 활동하다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왔단다.
"어제 리허설할 때 많이 설렜어요. 이건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저에게도 하나의 실험이에요."
그는 공연을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몸의 존재를 '생존의 문제'로 정의했다.
"몸이 없는 상태를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몸이 없다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0과 1로 이루어진 몸, 디지털 코드로 살아가는 신체를 상상했습니다. 그건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 질문이에요."
그가 무대에서 던진 숫자와 이미지들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언젠가 도달하게 될 '비물질의 시대'를 향한 사유였다. 이전 공연의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사회자 이단비씨는 "< XXX >는 '어려운 숙제'와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정찬일은 미소를 지었다.
"전시에서는 내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공연은 타인의 몸으로 표현되니까 완벽할 수가 없어요. 내 생각이 온전히 전달된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건 실패일 수도 있겠지만 역으로 가능성일 수도 있죠."
그에게 실패는 두려움이 아니라 태도였다. X라는 기호처럼, 그는 모든 의미의 경계에서 머문다.
"X는 물질을 넘어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 지점이에요. 그것이 예술의 본질 아닐까요?"
이번 무대는 결국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춤은 답이 아니라, 끝없이 흔들리는 물음표로 남았다.
"죽음을 생각한 건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예요. 저는 여전히 몸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극장을 나서는 길, 로비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엔 여전히 노란빛의 잔상이 남았다. 그 빛은 살아남기 위한 냉기의 온도.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건 춤이 아니라 삶이다. 그 말이 이날 공연의 모든 것을 대신했다. 정찬일 안무가는 오늘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그는 살아 있음을 자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은 여전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가."
그 질문이,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귀 안에 남았다. 그의 몸은 사라졌지만, 떨림은 여전히 남는다. 나는 그 떨림 속에서, 몸이란 결국 살아있기 위한 예술임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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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시사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에서 객원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는 '서울문화투데이' '더프리뷰' 등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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