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의 한 장면
디즈니플러스
한반도 분단으로 인해 강원도 철원 같은 전방 지역만 쇠퇴한 것은 아니다. 분단의 영향에 노출되지 않은 곳은 한반도 내에 없겠지만, 사극 <탁류>의 배경인 마포나루도 상당히 큰 피해를 받았다. 이 한강 포구가 입은 손해는 전방 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탁류>에서 묘사되는 마포나루는 비단을 포함한 각종 상품과 더불어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넘쳐난다. 상인과 여행객은 물론이고 일용직 노동자, 조직폭력배, 포도청 관헌들로 북적인다.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조직폭력배 장시율(로운 분)과 왕해(김동원 분), 포도청 종사관 정천(박서함 분)과 이돌개(최귀화 분)는 임진왜란 9년 전인 1583년에 북방에서 발발한 니탕개의 난 때 함경도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여진족이 일으킨 이 침략을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겪은 장시율과 정천, 여진족 군인이 되어 학살 현장에 있었던 왕해, 조선 군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이돌개가 9년 뒤 마포나루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함경도라는 공간에 있었던 그들이 하필이면 마포나루에서 다시 부딪히게 된 것은 이곳의 인적·물적 교류가 그만큼 활발하기 때문이다.
큰 번영을 누렸던 한국전쟁 이전의 마포나루
한국전쟁 이전의 마포나루는 <탁류>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한 번영을 누렸다. 물길을 통해 인천과 서울을 이어주는 이곳은 과거에는 전국적인 물류 허브였다. 그랬던 곳이 기능을 상실한 데는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작용했다.
하나는 철도의 출현이다. 강물을 묻히지 않고도 한강을 순식간에 건너는 철도의 등장은 한강물 위를 떠다니는 선박의 효용성을 떨어트렸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선의 개통이 그 신호탄이었다. 서울시 마포구가 펴낸 지방지인 <마포: 어제와 오늘, 내일>은 이렇게 설명한다.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간 경인선이 개통되고, 1905년 서울-초량간 전 구간이 완공, 개통됨에 따라 마포 지역에는 커다란 변화가 왔다. 곧 육상교통을 철도편에 의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수운에 의한 물자 수송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로 인해 마포가 담당해야 할 기능도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철도의 등장이 마포나루의 기능을 전면적으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은 여전히 상선들로 북적거렸다. 위 마포구지(誌)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에 마포에는 인천과 한강 하류지방으로부터 범선이 왕래하고 있었다. 일본 범선은 대개 30~50톤급으로 수송력이 철도 화차 2~3량과 같았는데, 운임도 톤당 1원 25전으로 철도 운임 t당 3원 50전에 비하여 거의 1/3 정도로 저렴하였다. 운반에 소요되는 시간은 강물이 불었을 때에는 1일, 그렇지 않을 때는 3일 정도 걸려서 마포에 도착하였다.'
이랬던 마포나루의 명맥을 끊어놓은 것은 한국전쟁의 산물인 휴전선이다. 휴전선은 남북의 경계선을 중부와 동부에서는 북쪽으로 올리고 서부에서는 남쪽으로 내렸다.
삼팔선 체제하에서는 개성을 비롯한 강화도 북쪽도 남한 땅이었다. 그래서 개성과 강화도의 중간을 지나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 물길이 하나의 정부에 의해 관리됐다. 하지만, 개성이 북한에 넘어간 휴전선 체제하에서는 한강 초입이 두 정부의 관할하에 놓이게 됐다.
이는 서해에서 한강으로 진입하는 선박의 길을 끊어놓았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으로 강화만이 막혀 한강으로 선박들의 출입이 금해지자, 마포의 포구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위 책은 기술한다. 마포나루가 해상운송 기능을 상실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휴전선 고착화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의 상처는 마포나루에도 배어 있다.
인간의 냄새뿐 아니라 해산물 냄새도 풍겼던 마포나루
▲<탁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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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가 왕성하던 시절에 이곳을 통과한 인상적인 상품으로 해산물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판 조폭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탁류>의 마포나루는 그들의 인간미를 많이 보여주지만, 실제의 마포나루는 인간의 냄새뿐 아니라 해산물의 냄새도 물씬 풍겼다. 서울역사박물관이 펴낸 <경강: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포는 서해의 어물이 많이 들어와 생선·건어물·젓갈·소금 등의 수산물이 집하되는 곳이었다. 마포는 경강 포구 가운데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여객주인(旅客主人)이 존재했던 유일한 곳이었으므로 전국의 어물선상(魚物船商)들은 모두 마포에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마포 주변은 해물 행상들의 고함 소리로 넘쳐났다. 마포구지는 "인천에서 배로 올라와 마포항에 대면, 생선장수가 이를 받아 지게에 지고 골목을 누비며 크게 외치며 다녔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민어·조기와 함께 마포나루 주변에서 가장 흔했던 해물은 새우젓이다. 판매 목적으로 새우젓갈을 담아두는 장독은 이 지역의 진풍경이었다.
1849년에 홍석모가 쓴 풍속학 서적인 <동국세시기>에 마포구 내의 지명 중 하나로 옹막(甕幕)이 나온다. 장독이 많다 해서 나온 옹막이라는 지명은 독막과도 혼용됐다. 지금의 대흥동과 용강동이 옹막 혹은 독막으로 불렸다.
이 중에서 독막이 변한 것이 동막(東幕)이다. 2006년에 발행된 위 마포구지는 "현재의 마포동에 인접한 대흥동·용강동은 최근까지 동막이라고 불렸다"고 알려준다. 마포나루에서 하역되는 새우들로 인해 젓갈이 풍성했던 이 지역의 모습을 반영하는 지명 변천이다.
그 같은 지역적 특성은 주민들의 신체적 특징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곳 상인들 중에 이마가 까만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새우젓 판매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양 서남쪽의 마포 사람들과 한양 동남쪽의 왕십리 사람들의 피부색에 관한 이야기가 마포구지에 설명돼 있다.
'서울은 그 지역마다 주민의 생업이 달랐다. 예를 들면,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장수'이고 '이마가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장수'라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왕십리 일대에는 미나리를 많이 심어 이것을 아침에 도성 안으로 팔러 들어오려면 아침 햇볕을 목덜미에 받아까맣게 그을렸고, 마포에는 새우젓이 많이 들어와 이를 팔려고 도성 안에 오자면 아침 햇볕을 이마에 받아 새까맣게 그을렸기 때문이다.'
왕십리 상인들은 미나리를 팔기 위해 아침 태양을 등지고 서쪽의 한양성으로 향하고, 마포 상인들은 새우젓을 팔기 위해 아침 해를 바라보며 동쪽의 한양성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포의 새우 상인들 중에는 이마가 까맣게 그을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탁류>가 묘사하는 마포나루는 옛날 한국의 물류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사람과 화물과 선박으로 북적이던 전국적인 항구였다. 오랫동안 조기 냄새, 새우젓 냄새가 물씬 풍긴 곳이다. 그런 냄새들이 사라진 데는 철도와 더불어 휴전선의 영향이 컸다. 분단만 해소돼도 과거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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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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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드라마보다 더 대단했다... 분단이 앗아간 '마포나루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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