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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침묵을 깨우길"

제10회 여성연극제 개막작, 연극 <낙월도> 서울씨어터 202에서 개막

25.10.12 14:55최종업데이트25.10.1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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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낙월도' 공연 사진
연극 '낙월도' 공연 사진극단 초인

"서울연극창작센터와 같은 좋은 극장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되어 여러모로 욕심을 내는 중이다. 여성인권, 노동문제 등 동시대성을 담아낸 재각색과 새로운 무대 운용에 특히 신경 쓰고 있다. 또한 연극이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침묵을 깨우는 예술이 되기를 바란다."

극단 초인의 부대표인 이상희씨는 제10회 여성연극제의 개막작 공개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 바람이 구체화된 연극 <낙월도>가 오는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연극창작센터 내 서울씨어터 202에서 막을 올린다.

'배'와 '라디오'가 지배하는 섬, 그리고 연극이 건네는 질문

지난 5월 '천승세 희곡열전'에서 <낙월도×맨발>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연출상, 작품상, 인기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연극계 안팎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천승세 작가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이 작품은, 향토성과 리드미컬한 문체로 그려낸 비극적인 세계 안에 묵직한 동시대의 문제를 압축해 담는다.

<낙월도>는 '여성', '노동', '정보', '권력'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외부와 단절된 섬을 배경으로 한 은유의 세계를 펼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섬의 이름은 "왕이 계집을 바다신에게 바치고 달을 얻었다"는 신화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실제 낙월도는 '배를 가진 자만이 떠날 수 있는' 철저히 고립된 공간이며, 이 공간의 지배자는 단 두 명뿐이다. 섬 전체의 여섯 척 중 다수를 소유한 '최부자', 그리고 제 손으로 배 두 척을 만든 '양서방'. 이들만이 정보를 듣고, 세상과 소통한다.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는 '라디오'다. 외부 세계의 정보가 들어오는 유일한 수단. 그런데 그 라디오는 권력자의 손에만 들려 있다. 정보의 단절은 곧 저항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귀덕이라는 인물이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는 뉴스는 1970년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다. 그 파장은, 귀덕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각성을 이끌어낸다. 이 지점에서 연극은 묻는다.

"정보와 배를 독점한 자들은 공동체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침묵에 익숙해져 있는가?"

 연극 '낙월도' 공연 사진
연극 '낙월도' 공연 사진극단 초인

오브제와 상징의 무대, 묵자와 청백이의 세계

이번 공연에서 이상희 연출은 시각적, 심리적 상징성을 극대화했다. 벤치형 오브제는 배가 되기도 하고, 대청마루나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심리적 장치로 변주된다. 무대는 단지 재현의 공간이 아니라, 질문과 감정의 흐름이 교차하는 입체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야기꾼 '묵자'는 두 명의 배우가 함께 맡아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고, 무대의 큰 도구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이들은 비극적인 서사를 동화처럼 풀어내는 '판타지적 장치'로 기능하며, 서사와 상징을 관객 가까이 끌어들인다.

또한 원작에 등장하는 무당 '청백이'는 이번 공연에서 초자연적 존재이자 힐링 메이커로 이미지화됐다. 그는 신화적인 상징과 함께 등장하여, 죽음을 앞둔 자들의 두려움을 걷어내고 그들에게 위로와 숭고함을 건넨다. 등장 장면에서는 마태오복음 11장 28절의 성경 구절이 인용된다.

"무릇 수고하고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 나 너희를 쉬게 하리라."

청백이는 이 구절처럼, 짐진 자들에게 쉬어갈 순간을 허락하는 존재다.

무대는 시작부터 '제3의 벽'을 허문다. 모든 배우들이 캐릭터 이전에 배우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해 공연을 여는 것. 이는 낯선 서사의 장벽을 허물고, 관객과 서사의 간극을 좁히는 장치다.

낙월도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지옥 같은 섬

연극은 '최부자'와 '양서방'의 갈등을 축으로, 섬의 계급 구조를 천천히 드러낸다. 이들과 함께 섬에서 노동하는 노잽이들-덕주, 종천, 용문, 그리고 머슴인 용배-은 늘 굶주림과 모욕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제 힘으로는 도망조차 갈 수 없는 여성들은 고된 일상 속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섬을 떠날 수 있는 배는 단 여덟 척뿐이다. 그 배조차도 철저히 통제된 채 누군가의 권력으로 작동한다.

이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구조의 축소판이다. 계급, 권력, 정보, 젠더. 이 모든 불평등의 작동 방식이 낙월도의 섬이라는 설정 안에 정교하게 배치된다.

그리고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월순의 죽음을 바라본 용배는 외친다.

"나한테 그 노만 줘봐."

이 한 마디는 그 어떤 함성보다 큰 울림을 전하며 관객에게 되묻는다.

"과연 우리는, 지금 이 사회의 침묵에 어떤 태도로 반응하고 있는가?"

연대의 예고편, 침묵을 넘어선 첫 문장

올해로 10회를 맞이한 '여성연극제'는 '연대의 가능성'과 '목소리의 복원'을 화두로 삼고 있다. <낙월도>는 이 연극제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개막작이자, 전체 축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첫 문장이 된다. 침묵을 강요받았던 존재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내지르는 외침. 연극 <낙월도>는 연대와 각성을 향한 예술적 제안이다.

이번 여성연극제는 서울의 가을 대표축제 '서울어텀페스타'와 함께 하며, 총 5편의 공연과 강연, 세미나, 시민 참여형 행사로 구성된다. <낙월도>를 시작으로 <양심이 있다면> <더 클래스> <말, 하지 않더라도> <서찰을 전하는 아이>가 이어지고, 1세대 무대 미술가 신선희 작가 강연과 박현숙·김자림 극작가 세미나, 시민독백대회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도 펼쳐질 예정이다.

 연극 '낙월도' 공식 포스터
연극 '낙월도' 공식 포스터극단 초인
연극 극단 초인 여성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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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시사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에서 객원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는 '서울문화투데이' '더프리뷰' 등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