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주)파크컴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뜨거운 반응과 함께 수많은 해석을 유발한 화제작이다. 황량한 나무 근처에서 '고도'라는 미지의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이야기를 다룬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여전히 거론된다.
국내에서도 1969년 연출가 임영웅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선보인 이래 아직까지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10월 초까지 임영웅 연출이 설립한 극단 산울림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선보였고, 공연 제작사 파크컴퍼니는 원로 배우 신구와 박근형을 앞세워 장기 공연을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끝내 고도는 오지 않는다. 작품에도 고도가 등장하지 않고, 원작자조차 고도의 존재를 설명한 적 없으니 <고도를 기다리며>는 의아하면서도 조금은 난해한 연극으로 여겨졌다. 이에 극작가 데이브 핸슨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유쾌하게 오마주하여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선보였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배경은 언더스터디의 대기실이다. 언더스터디는 출연 배우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곧바로 투입되어 그의 역할을 대신하는 배우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에스트라공의 언더스터디 '에스터'와 블라디미르의 언더스터디 '밸'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를 연기했던 박근형이 이번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서는 에스터를 연기한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활약해온 배우 김병철이 9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해 박근형과 같은 역을 맡는다. 초연 당시 밸을 연기했던 최민호(샤이니)가 이번에도 다시 무대에 오르고, 이상윤이 같은 역을 소화한다. 무대조감독 로라 역은 김가영과 신혜옥이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연극은 11월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공연된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명의 언더스터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주)파크컴퍼니
에스터와 밸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오를 날을 기다린다.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언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은 건 아니다. 무대에서 무슨 일이 생겨 출연 중인 배우가 도저히 공연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야만 에스터와 밸이 무대에 설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연이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에스터와 밸은 무대에 오를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이 언젠가 연기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간다.
대기실에는 공연 진행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무대 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사도 어렴풋이 들려온다. 이런 소리를 뒤로 하고 에스터와 밸은 대화를 나누고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낸다. 마치 원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며 행하는, 어찌 보면 무의미하게 보이는 일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타나는 무대조감독 로라를 보고 둘은 연출이 아닌지 묻는다. 에스터와 밸이 생각하기에 연출이 자신들을 찾아오는 순간이 바로 사고가 발생해 자신들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에스터와 밸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듯이 연출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렇듯이 에스터와 밸도 연출이 누구인지, 성별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로라를 두고 연출인지 아닌지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렇듯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는 원작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다수 등장한다. 만약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미 관람한 관객이라면 반가운 장면과 대사, 그리고 연상되고 연결되는 장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을 먼저 관람하지 않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원작의 주제 의식을 충실히 살리면서 위트와 유머를 더했으니, 어찌 보면 <고도를 기다리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로도 제격이다.
명작의 유쾌한 변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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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터와 밸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언젠가 자신들에게 다가올 고도, 즉 무대에 오를 날을 기다리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둘의 의견이 충돌하기도 한다. 밸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서 연극대로라면 우린 대기실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지친 밸은 기다림을 공허한 약속이나 꿈으로 여기기도 한다.
반면 에스터는 예술을 한다는 건 원래 고단한 일이라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이니 마저 기다림을 감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름길은 없다고, 정직하게 규칙을 지켜야 한다며 밸과 대립각을 세운다. 두 인물의 의견 대립을 유발하고 불을 지피는 사건은 어찌 보면 사소하고 우스꽝스럽다.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위트와 유머가 빛을 발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약 3시간 동안 공연되는 반면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85분 동안 공연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게감과 모호함을 덜어내고, 문장과 문장 사이 휴지를 줄였으며, 이른바 '티키타카'에 치열함을 더했다. 그렇게 맞이하는 엔딩에서 한때 대립하던 에스터와 밸의 입장이 교점을 찾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배우 두 명이 거의 무대를 떠나지 않고 연기를 이어가기 때문에 에너지와 서로 간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출연하는 배우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가능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에스터 역의 배우에 따라 엔딩에 미묘한 차이도 있으니, 여러 번 관람하며 곱씹어보기에도 좋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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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감 덜고 치열함 더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유쾌한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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