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드북> 공연 사진
(주)아떼오드
과감하게 규범을 비트는 뮤지컬
뮤지컬 <레드북>은 규범을 당돌하게 비튼다.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신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다. 여성의 글쓰기는 허용되지 않았고, 기껏해야 글을 읽는 것 정도만 용인되던 시기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글을 읽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었다.
뮤지컬에는 여성 억압의 사례들이 조금 더 소개된다. 이혼의 요건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까다롭고, 미혼인 안나는 사람들로부터 편견 섞인 농담을 듣는다. 규범은 권력의 강압을 통해서도 유지되지만 사람들의 자발적인 순응도 규범의 유지에 크게 기여한다. 억압받는 사람들조차 규범에 의문을 품지 않을 때 규범은 더 강고해지는데, 뮤지컬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그렇다.
브라운을 비롯해 뮤지컬에 등장하는 신사들은 매너와 품위를 강조하는데, 신사는 모든 면에서의 규범을 모범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규범에 의문을 품지 않는 무감각이 신사를 만드는 셈이다. 브라운이 그런 신사를 상징하는데, 그는 '이게 규범이기 때문에' 여성이 글을 쓰는 것에 순수하게 거부감을 갖는다.
안나는 이런 시대의 억압을 거슬러 이야기를 상상하고 글을 쓴 여성이다. 안나와 같은 여성들은 더 있었다. 로렐라이가 이끄는 '로렐라이 언덕'에 여성들이 모여 이미 글을 쓰고 있었고, 훗날 안나는 로렐라이 언덕의 일원이 되어 여성들과 함께 글을 쓴다. 누군가는 여성의 글쓰기를 두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이라고 말하는 등 극중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갖는 의미가 다양하게 제시된다.
또 하나 굵직하게 제시되는 도덕이자 규범은 '사랑은 불변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굳게 믿은 브라운은 갑자기 이혼 사건을 수임하게 되자 고민에 빠진다. 이때 안나는 사랑은 변할 수도 있는 것임을 브라운에게 속삭이는데, 이때 발랄하게 흐르는 넘버가 '사랑은 마치'이다. 이는 규범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안나의 지적이기도 한데, 이때부터 브라운의 성찰이 시작된다.
곧이어 브라운은 안나의 말을 따라 판사들 앞에서 변론을 이어간다. 판사들은 브라운보다 더 강하게 사랑을 불변한다고 믿었다. 동시에 판사는 규범을 수호하고 유지하며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는 상징적인 존재인데, 브라운의 변론에 판사들의 태도도 조금씩 변화한다. <레드북>이 규범을 비트는 방식이다.
▲뮤지컬 <레드북>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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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말하는 글쓰기의 의미
안나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성들과 함께 '레드북'을 출간한다. 각자가 상상한 이야기를 적은 잡지로, 금서 같은 이름에서부터 도발적인 기운이 물씬 풍긴다. 여성들의 생생한 이야기, 때로는 당돌한 사랑 이야기에 사람들은 관심을 보인다.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신사들도 레드북에 관심을 보인다. 아이들이 보기 전에 미리 검사하겠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레드북을 손에 넣고 몰래 읽는다.
하지만 여성들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다. 레드북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안나와 로렐라이 언덕의 여성들은 재판에 넘겨진다. 변호사이자 안나의 연인인 브라운은 이들에게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고 고백하며 죄를 시인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한다면 처벌을 면할 것이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처벌이 따를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고민한다.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만약 규범에 순응해야만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킬 수 있다면 자신의 죄를 시인할 것이고, 규범을 거슬러야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면 당당하게 저항할 것이다.
안나는 처벌을 무릅쓰고 후자를 택한다. 안나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고, 안나는 자기 자신에게 가닿기 위해 글을 썼음을 고백한다. 안나에게 글쓰기란 시대가 감춰놓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자 고유한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때 안나가 부르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은 단연 <레드북>의 하이라이트 넘버다. <레드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안나 이외의 다른 인물들의 고유한 삶도 길어낸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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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글쓰기가 금기시되던 시대, 안나가 펜을 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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