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탁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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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같은 파격적 기용은 서애 유성룡의 천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순신이 우을기내를 처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우혜 논문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전해에 전라좌수사로 승진하게 된 단초는 니탕개란의 진압 과정에서 그가 세운 전공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드라마 <탁류>는 주인공 시율이 마포나루에 출현한 배경을 설명하고자 니탕개의 난을 거론했지만, 이 사건이 갖는 실제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이는 이순신이 전라도 해안에 출현한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니탕개의 난이 이순신만 배출한 것은 아니다. 훗날 임진왜란을 이끌 주역들이 이 전란을 통해 부각됐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18권은 이때 공로를 세운 정언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계미년 니탕개의 난 때 함경도순찰사로 발탁되고, 주상께서 운검을 하사하셨다. 공(公)은 사람을 알아보는 일을 잘하여, 막하의 관료들이 이순신·신립·김시민·이억기처럼 모두 명장이었다."
신립은 임란의 패장이지만, 이순신과 더불어 김시민·이억기는 임란의 명장들이다. 종전 6년 뒤인 1604년에 선정된 선무공신 18명 중에서 이순신은 권율·원균과 함께 1등공신, 김시민·이억기는 2등공신이 됐다. 원균도 니탕개의 난 때 전공을 세웠다. 1등공신 셋 중 둘이 니탕개의 난 출신이었던 셈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한산도대첩(이순신)·행주대첩(권율)·진주대첩(김시민)의 두 주역도 니탕개의 난 출신이다. 니탕개의 난 때 김시민은 29세의 6년차 무관이었다. 이는 김시민에게도 소중한 전투 경험이었다.
임진왜란 선무공신 18명 중에 무과 출신은 11명이다. 11명 가운데 6명이 니탕개의 난 출신이다. 위의 민덕기 논문은 "선무공신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장수로 김준민·선거이·원호·이경록·최호·황진 등 11명의 전력을 검토하였더니 그들 또한 니탕개의 난 또는 1580년대 6진 지역에서 활약한 장수였음이 명확해졌다"고 알려준다.
이순신의 참모들 중에서 나대용·송희립·변존서·배응록은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목적으로 실시된 특별 무과시험인 별시(別試)의 급제자들이다. 이 정도면 니탕개의 난 출신들이 임진왜란을 상당부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논문에 따르면,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1583년과 1584년에 실시한 무과시험의 급제자는 무려 803명이다. 첫해 601명, 이듬해 202명이다. 종전의 최고 기록인 1519년의 46명과 확연히 대조된다.
임진왜란 1년차인 1592년은 위 급제자들의 기량이 한창 왕성할 때다. 니탕개의 난이 한민족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가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임진왜란에 가려진 이 사건에 대한 적극적 조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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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