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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속 전투 현장, 실제 1등 공신에 '이순신' 있었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디즈니플러스 <탁류>

25.10.08 17:47최종업데이트25.10.0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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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9년 전에도 큰 전란이 있었다. '니탕개의 난'으로 불리는 이 전란은 디즈니플러스 사극 <탁류> 제3회에서 묘사됐다. 산 중턱의 조선 성벽을 향해 벌떼 같은 여진족 군단이 함성을 내지르며 진격하고, 성곽 위의 조선군은 돌발 상황에 당황해 하며 후퇴하기에 바쁜 장면이다.

훗날 포도청 종사관이 되어 마포나루의 폭력배들과 유착하게 될 이돌개(최귀화 분)도 함경도에서 벌어지는 이 전투 현장에 등장한다. 상관이 "두려워 마라", "자기 자리를 지켜라"며 독려하는데도, 이돌개는 호흡이 가빠지며 무기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달아난다.

성문이 허술하게 뚫리자 읍성 주민들은 간단한 봇짐만 집어든 채 달아난다. 어린 소년인 주인공 시율(로운 분)은 여진족 군인의 칼에 어머니를 잃고 그 자신도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런 그가 9년 뒤 마포나루에 등장해 주먹 세계를 장악하는 스토리가 드라마에서 전개된다.

임진왜란 버금가는 환란

 드라마 <탁류>의 한 장면.
드라마 <탁류>의 한 장면.디즈니+

니탕개의 난은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환란이다. <전북사학> 2017년 제50호에 실린 민덕기 청주대 교수의 논문 '임진왜란에 활약한 조선 장수들의 성장 기반에 대하여-니탕개의 난과 관련하여'는 두만강 연변의 군사시설 대부분이 공격을 받은 이 난의 그 규모를 이렇게 설명한다.

"니탕개의 난은 1583년부터 기간도 4년 이상 끌었으며, 그 규모도 적을 때엔 5천 명, 많을 때는 2만~3만 명 규모였다. 그 피해도 6진(鎭)의 진보(鎭堡) 43개 가운데 두만강 연변의 대다수 진보가 모두 그 침략을 받았다."

이 난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군인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조선 침략을 주도한 3인 중 하나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사로잡아 목숨을 빼앗았다. 울지내(鬱只乃)로도 불리는 우을기내는 니탕개 및 율보리와 함께 여진족 진영의 3대 주역이다.

1545년에 출생하고 1576년에 무과시험을 통과한 이순신은 함경도 최전방에 배치된 1583년에 우을기내를 상대했다. 이민웅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의 <이순신 평전>은 이때 이순신이 거둔 전공과 겪은 비애를 함께 설명한다.

"그는 부임한 뒤 작전을 꾸며 울지내 등을 꾀어내어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속 상관인 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김우서가 이순신이 자신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함부로 작전을 벌였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려 조정의 시상(施賞)을 막았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선조실록>에 우을기내를 잡은 공로로 북병사와 그의 군관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김우서에게 전공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이순신이 실제 공로자라는 점은 은폐되지 않았다. 조정에 대한 김우서의 보고에서도 이순신의 역할이 드러난다.

<역사비평> 2005년 8월호에 게재된 소설가 송우혜의 논문 '조선 선조조의 니탕개란 연구'는 "선조시대에 '무장 이순신'의 존재가 처음으로 크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니탕개의 난리를 진압하는 중에 벌어졌던 '우을기내 사건'이었다"고 한 뒤에 이 전공의 의의를 기술한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매우 큰 주목을 받았다. 1차와 2차 니탕개란을 모두 통해서 아군이 오랑캐 졸개들은 많이 베었으나, 우두머리를 사로잡거나 목을 친 일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니탕개란 진압의 최고 수훈자로 꼽혔던 신립의 경우조차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가장 아슬아슬하고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는 종6품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이 1591년에 정3품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이순신이 해상방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이듬해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훨씬 더한 시련이 됐을 것이다.

나탕개의 난에 부각된 사람들

 드라마 <탁류>의 한 장면.
드라마 <탁류>의 한 장면.월트 디즈니 코리아 컴퍼니

그 같은 파격적 기용은 서애 유성룡의 천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순신이 우을기내를 처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우혜 논문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전해에 전라좌수사로 승진하게 된 단초는 니탕개란의 진압 과정에서 그가 세운 전공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드라마 <탁류>는 주인공 시율이 마포나루에 출현한 배경을 설명하고자 니탕개의 난을 거론했지만, 이 사건이 갖는 실제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이는 이순신이 전라도 해안에 출현한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니탕개의 난이 이순신만 배출한 것은 아니다. 훗날 임진왜란을 이끌 주역들이 이 전란을 통해 부각됐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18권은 이때 공로를 세운 정언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계미년 니탕개의 난 때 함경도순찰사로 발탁되고, 주상께서 운검을 하사하셨다. 공(公)은 사람을 알아보는 일을 잘하여, 막하의 관료들이 이순신·신립·김시민·이억기처럼 모두 명장이었다."

신립은 임란의 패장이지만, 이순신과 더불어 김시민·이억기는 임란의 명장들이다. 종전 6년 뒤인 1604년에 선정된 선무공신 18명 중에서 이순신은 권율·원균과 함께 1등공신, 김시민·이억기는 2등공신이 됐다. 원균도 니탕개의 난 때 전공을 세웠다. 1등공신 셋 중 둘이 니탕개의 난 출신이었던 셈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한산도대첩(이순신)·행주대첩(권율)·진주대첩(김시민)의 두 주역도 니탕개의 난 출신이다. 니탕개의 난 때 김시민은 29세의 6년차 무관이었다. 이는 김시민에게도 소중한 전투 경험이었다.

임진왜란 선무공신 18명 중에 무과 출신은 11명이다. 11명 가운데 6명이 니탕개의 난 출신이다. 위의 민덕기 논문은 "선무공신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장수로 김준민·선거이·원호·이경록·최호·황진 등 11명의 전력을 검토하였더니 그들 또한 니탕개의 난 또는 1580년대 6진 지역에서 활약한 장수였음이 명확해졌다"고 알려준다.

이순신의 참모들 중에서 나대용·송희립·변존서·배응록은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목적으로 실시된 특별 무과시험인 별시(別試)의 급제자들이다. 이 정도면 니탕개의 난 출신들이 임진왜란을 상당부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논문에 따르면,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1583년과 1584년에 실시한 무과시험의 급제자는 무려 803명이다. 첫해 601명, 이듬해 202명이다. 종전의 최고 기록인 1519년의 46명과 확연히 대조된다.

임진왜란 1년차인 1592년은 위 급제자들의 기량이 한창 왕성할 때다. 니탕개의 난이 한민족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가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임진왜란에 가려진 이 사건에 대한 적극적 조명이 필요하다.
탁류 니탕개난 이순신 6진 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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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