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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뒤흔든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 뮤지컬에선 이렇게 다뤘다

[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25.10.04 10:21최종업데이트25.10.0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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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런던에서 이전까지 공개된 바 없는 셰익스피어의 유물들이 무더기로 공개되며 문학계와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일이 발생한다. 러브레터, 차용증, 그리고 새로운 희곡까지 공개된 것. 그 중심에는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와 그의 아버지 '윌리엄 사무엘 아일랜드'가 있었다. 헨리가 발견에 앞장서고, 사무엘이 이에 동조하며 사건의 스케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헨리와 사무엘은 훗날 법정에 서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유물들을 위조해 공개했다는 혐의로 말이다. 훗날 헨리는 고백록을 통해 자신이 셰익스피어의 필체를 따라 베끼고 문서를 만들어 유물들을 위조했으며, 아버지 사무엘로부터 인정을 받자 위조를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무엘은 아들의 위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셰익스피어의 유물을 진짜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이라고 불리는 실제 이야기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바로 이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창작물로, 2023년 초연에 이어 올해 재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사무엘과 헨리 부자를 다시 법정에 불러 세워 사건을 추적하고, 재판 이후의 이야기까지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헨리는 실제로 미지의 신사로부터 유물을 건네받았다고 거짓말을 한 바 있는데, 미지의 신사는 뮤지컬에서 'H씨'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연 사진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연 사진연극열전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 가짜에 열광한 세상

사소한 것도 사소하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던 헨리는 정작 아버지 사무엘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 똑똑하지도, 무언가에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가 무심코 베껴 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사무엘은 진짜 셰익스피어가 쓴 유물이라고 착각한다. 헨리는 그저 자신이 베껴 쓴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려 하지만 크게 기뻐하며 자신을 인정하는 아버지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가짜 유물은 아주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사무엘은 인정받지 못한 작가다. 자신의 글에 문단은 혹평을 쏟아냈고, 문인 사회로부터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유물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사무엘을 향한 시선을 달라진다. 혹평받던 작품은 칭송되기 시작하고, 문인들의 커뮤니티에서도 사무엘을 향한 러브콜이 이어진다. 이후 사무엘은 더 적극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유물들을 공개한다.

어떤 포장지로 둘러싸여 있는지가 중요한 세상이다. 사무엘의 글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무엘이 셰익스피어의 유물들을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무엘의 글은 다른 평가를 받는다. 메신저의 이미지가 달라졌을 뿐인데, 메시지까지 다르게 보이는 착시가 세상을 뒤덮는다. 사무엘은 이런 착시의 수혜자이기도 하지만, 사무엘 역시 또 다른 착시를 겪는 사람 중 하나다.

사무엘의 세계관에서 셰익스피어는 신성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에게 평범하고 면모, 인간적인 추함은 존재할 수 없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넘버의 가사에 따르면 사무엘에게 셰익스피어는 우아한 신사여야 하고, 예술의 수호자여야 하며, 성공회 신자여야 한다. 셰익스피어에게 다른 정체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른 정체성이 허용된다면 사무엘의 세계관은 처참하게 무너질 터이다.

이미지로 둘러싸인 세상에서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굳게 믿고 재생산할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된다.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이를 두고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는 세상"이라고 진단한다. 실제 진위 여부와는 무관하게 다수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이 된다. 더 무서운 건 다수가 믿고 싶어하는 게 진실이 될 때다. 이때는 진실이 밝혀져도 외면 받거나 공격의 대상이 된다.

재판에서 헨리는 진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사무엘은 헨리의 고백을 믿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헨리의 고백을 외면한다. 헨리는 추방 당하지만, 사무엘은 런던에 남아 셰익스피어의 가짜 유물들을 진짜라고 속이며 돈벌이를 이어간다. 역사는 정녕 반복되는 것이란 말인가,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 잔다르크 등의 가짜 유물들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까지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이야기한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연 사진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연 사진연극열전

진실을 사랑하게 하는 이야기의 힘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진 배경에는 헨리와 사무엘의 초라한 처지가 자리하고 있다. 헨리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사무엘은 작가지만 문단과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다. 사무엘은 이룬 것 하나 없이 초라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헨리는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자 거짓말을 지속했고, 사무엘 역시 세간의 주목을 받자 유물을 공개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초라한 현실과 화려한 거짓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개인의 절제력이나 강한 의지만으로 초라한 현실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해답은 있는가,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나름대로의 해답까지 내놓는다.

해답은 본래의 헨리에게 있다. 헨리는 사소한 걸 사소하지 않게, 평범한 존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해 곳곳에 이야기를 불어넣었다. 어쩌면 헨리가 불어넣은 이야기는 헨리 본인에게, 아버지 사무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헨리가 셰익스피어의 유물을 위조하기 시작한 건 '소네트 130'을 베껴 쓰면서부터다. 연인의 뺨은 붉은 장미보다 아름답지 않고, 연인의 음성이 음악보다 아름답지 않지만, 그럼에도 연인을 사랑한다는 셰익스피어의 고백이 담긴 소네트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연인이 거짓으로 포장된 그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읊조린다. 바로 이 소네트는 사건의 발단임과 동시에 마지막에 모든 걸 봉합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거짓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특별한 것이 있고, 그것은 사랑받기에 충분하다고 셰익스피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헨리에게 말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11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NOL 서경스퀘어 스콘 2관에서 공연된다. '사무엘' 역에 김수용·이경수·박유덕, '헨리' 역에 강찬·이진우·강병훈, 미지의 신사 'H씨' 역에 임강성·김지철·이석준이 출연한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연 사진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연 사진연극열전
공연 뮤지컬 윌리엄과윌리엄의윌리엄들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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