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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떠도는 여성, 부산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작의 진가

[넘버링 무비 521]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25.09.29 16:34최종업데이트25.09.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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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누가 안 잊었다고 하면 잊은 거고, 잊었다고 하면 기억하는 거야."

30분만 걸으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을 루오무의 민박집 '무란'. 바이(바이바이허 분)는 3년 전에 받은, 오래전 헤어진 남자 친구 왕의 엽서 한 장을 들고 이곳에 찾아왔다. '루오무의 황혼'이라 적힌, 뜻 모를 엽서를 들고 마을을 산책하면서 그는, 곳곳에서 왕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항상 와인 잔을 들고 다니는 민박집 주인 리우(류 단 분)와 그의 남자 친구 황(황 지안신 분), 리우의 술친구인 샤오펭(펭진 분), 그리고 그곳을 찾는 손님과 마을 주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바이의 일상에 등장하면서, 조용히 며칠 머물다 가려던 바이의 계획은 조금쯤 소란스러워진다.

영화 <루오무의 황혼>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작품 활동의 궤적 속에 놓여 있던 장률 감독이 그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중국 땅에 머물면서도 그 움직임의 정서를 잃지 않는 작품이다. 감독의 초기와 중기 작품 속에서 반복되어 활용되어 왔던 이동과 부재의 감각은 이번 영화에서 작은 마을의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그 장면 속에서 머무는 일과 다시 되돌아가는 일, 그리고 떠나보내는 일의 표상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사건이란, 마을을 찾은 바이가 전 남자 친구의 엽서 한 장을 단서로 그 흔적을 쫓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 어떤 장면도 서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서사의 흔적을 한 겹씩 펼쳐 보이는 방식이 이번 작품의 주된 전개 방식이다. 등장하지 않는 인물 왕의 서사가 극의 동력을 대신하는 동안, 앵글은 현재의 프레임 속에 존재하는 남겨진 이들의 시선과 호흡에 머물고자 한다.

02.
때마다 등장하는 중심인물 바이의 혼잣말, 존재하지 않는 인물 왕과의 대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의 드라마는 일부 서간체 형식으로 읽힐법한 부분이 있다. 특히, 3년 전 사라진 남자가 보낸 엽서 속 '루오무의 황혼'이라는 단어는 바이가 마을로 향하게 되는 시작점이자, 응답이 보류된 물음처럼 남아 극 중 모든 만남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해석하기라도 하려는 듯, 바이가 마을을 걷는 일은 편지를 읽는 행위처럼도 여겨지고,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은 흩어져 있는 조각이 한 곳에서 맞춰지는 심리적 편집처럼도 느껴진다.

사실 이 영화는 사라진 남자의 정체나 떠난 이유를 파헤치는 일에는 애초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이는 극 중 인물들이 갖고 있는 일련의 모든 서사가 해답을 갖고 있지 않는 것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전작에서도 그러했듯이, 장률 감독은 그런 인물의 결핍을 하나의 사건화로 진행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착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두는 행위임과 동시에,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왔을 이들을 한 자리에 소환하면서도 각각의 레이어가 겹치기는 할지언정, 서로 섞이지는 않도록 만드는 작업에 해당된다.

엽서라는 물성과 그에 쓰인 최소한의 정보가 이 영화가 가진 주요 맥락의 전부이지만, 그 단서조차 서사적 동력을 가지지 않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도리어 영화는 각자가 가진 규칙과 리듬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가진 상처의 단면마저 이야기할 정도까지 나아가게 된다. 물론 그 과정은 서사의 누적이 아닌 감각의 축적 속에서 이루어지며, 영화는 그 모든 장면을 농담처럼 돌려 말하고, 일상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채우고자 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3.
"아무리 좋은 곳이어도 숨겨진 장소가 있기 마련이지."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 여행자 바이와 여관 주인 류 사이의 시퀀스다. 두 사람은 결코 서로에 대한 감정적 지지나 위로를 직접적으로 건네지 않지만, 각자가 살아온 인생에서 경험해 온 결핍과 상실의 감정을 서로 교환하며 관계를 형성해 간다. 각각의 삶에서 '떠나는 일'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좁히고 공동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이유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마을에서 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는, 3년 전 바이의 곁을 떠난 공통의 인물도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대화와 농담, 사라진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돌려 말하며 나누는 감정적 교류를 통해 일종의 연대와 문법이 구축되는 것이다. 밤마다 온몸이 젖을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상태가 되는 바이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류의 모습도 여기에 포함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이 영화 속 민박이라는 공간이 그러하듯, 교훈과 미덕을 억지로 밀어 넣지 않으면서 서로의 과거 속 그림자를 안전하게 멈춰둘 수 있는 장소가 된다.

04.
극 중 인물들이 민박집에 모여 테크노풍의 아리랑을 틀고 모두 함께 춤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와도 같다. 전통적 멜로디를 전자적 비트로 재해석한 음악 위에서 인물들이 춤을 추는 장면은 과거의 언어를 현재의 신체로 번역해 내고자 하는 감독의 시도처럼 보인다. 무겁고 진지한 텍스트가 아니라, 조금도 통일되지 않은 채로 각자의 엇박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낄 수 있다. 이 장면 이전에 존재한 내용이 결핍과 상실, 부재의 흔적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말과 플롯으로는 모두 해소할 수 없었던 심리적 지점을 흘려보내는 장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낮의 끝점이자 밤의 새로운 시작점이 될 '황혼'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 경계에서 울려 퍼지는 아리랑이라는 매개의 한(恨)의 정조는 시간을 잠시 유예시키는 듯한 느낌마저 주는 듯하다. 이 작품이 (심지어는 엔딩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서사를 통해 어떤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까지 모두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 장면에서 극중 인물이 경험하게 되는 클라이맥스가 어떤 상실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삶의 속성을 시각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만 관계, 이미 변해버린 시간, 꿈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괴리와 같은 모든 경계적 시점들이 재편된 낯선 박자 위에서 이질적으로 발화하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루오무의 황혼>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세상일은 다 돌고 도는 거야. 슬프진 않아. 조금 허탈하긴 하네."

영화 <루오무의 황혼>이 보여주는 서사적 핵심은 사라진 남자의 부재를 경유해, 남아 있는 자들의 감각을 정렬하는 일이다. 장률 감독은 자기 고백의 언어와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언어적 행위가 때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백의 윤리를 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소소한 농담과 짧은 대화, 걷는 행위와 긴 침묵만이 과거의 상처를 말없이 공유할 뿐이다. 이 영화가 재회나 화해에 관한 약속을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신 그저 살아가는 일의 중요함을 다시 상기시키고자 한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의 심사 위원장을 맡은 나홍진 감독은 이 작품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이견이 하나도 없었고, 만장일치로 너무나 쉽게 결정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영화제가 올해 첫 경쟁 섹션을 열고 그 첫 번째 대상을 이 작품에 안긴 것에는 <루오무의 황혼>이 갖고 있는 사소함과 유머, 몽환과 연대, 공간에 대한 서정적 시각이 동시대의 유효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가 가진 높은 수준의 감정적 밀도가 서사적 설득만큼이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루오무의황혼 경쟁부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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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