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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방식이 다를 뿐, 춤은 늘 제 안에 있었어요"

[인터뷰] 'Extinction Ver.2'로 돌아온 전혁진 안무가

25.09.29 17:34최종업데이트25.09.2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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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못한 순간은 정말 소멸하는가?'

오는 12월 5일부터 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무용 〈 Extinction Ver.2 〉의 전혁진 안무가는 1년만에 컴백하는 신작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번 작품은 2025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무용분야 제작공연 < 아르코 댄스 UP:RISE > '스테이지2' 선정작으로 그동안 선보였던 단순한 무용과는 다르다. 몸과 이미지, 기억이 교차하는 다층의 구조 속에서 작품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플로어 위 조명을 받은 무용수들이 조용히 움직인다. 무대 한켠엔 커다란 카메라 장비가 놓여 있다. 객석 쪽 스크린에는 노이즈가 낀 영상이 실시간으로 송출된다. 영상팀 스태프는 조도 값을 조절하고 있다. 무용수는 카메라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셔터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기억'과 '이미지'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지워지는 현장. 마치 무대 자체가 하나의 기록 장치처럼 느껴진다.

2024년 아르코 댄스 UP:RISE Stage1에서 발표한 초연작을 바탕으로, 올해는 1시간 분량의 완성작을 Stage2로 발표하게 됐다. '소멸'이라는 주제를 추적하던 작업은 이제 완결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전혁진 특유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시선이 있다. 이번 작업에서 그는 AI 기반의 영상과 사운드를 도입한다. 신체는 점차 이미지로 전이되고, 동작은 사진의 잔상으로 남는다. 카메라 셔터는 무대의 시간성과 맞물려, 관객에게 새로운 시점을 부여한다.

무대 위에서 생성되는 기억의 층위

 전혁진 프로필
전혁진 프로필전혁진

공연은 총 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Alive'에서는 무용수의 장면이 장노출 사진으로 남아, 몸이 이미지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Portrait'에서는 고정 프레임과 무빙 카메라가 교차되며, 몸의 세밀한 감각들이 영상으로 전이된다. 'Sense of relationship'은 오브제와 함께 구성된 공간 안에서 인간 관계의 단절과 흔적을 다룬다. 이어지는 'Youth'와 'Extinction'에서는 조명의 흐름, 공간의 축소, 그리고 이미지의 소거를 통해 서서히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마지막 장면 'Extinction'은 조명이 점점 무대를 좁혀가며, 관객의 시선이 서서히 응축되는 체험을 만들어낸다. 그 장면에서 무용수의 동작은 점차 느려지고, 배경 영상은 서서히 암전된다. 잊혀져가는 기억, 끝내 닿지 못한 움직임이 무대 위에서 사라질 듯 머문다. 그 여운은 길다. 무언가를 목격했으나 손에 쥐지 못한 느낌. 그것이 전혁진이 말하는 '소멸'이다.

존재하지 않지만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작품의 바탕에는 알츠하이머라는 병리적 현상이 있다. 하지만 전혁진은 병 그 자체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에 주목한다. 사라진다는 것. 존재했지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억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리는 것. 그는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사건이라 말한다.

전혁진은 그간 사진, 영상, 무용을 넘나들며 작업해왔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춤은 제 안에 늘 있었습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저는 언제나 무용을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무대에 서는 무용수보다, 무대 뒤 카메라를 잡고 있던 시절이 더 길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작업의 출발에는 '몸'이라는 감각이 있었다.

아르코 댄스 UP:RISE는 그에게 새로운 계기가 됐다.

"작품을 다시 다듬고, 장기적으로 레퍼토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사업이 그런 시간을 열어줬어요."

협업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영상을 송출하고, 사진 이미지를 활용하며, 안무와 영상 효과의 균형을 조율해야 했다.

"카메라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공연 현장에서의 실시간 영상 연출은 훨씬 복잡했어요.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야 했고, 안무와 영상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긴밀하게 조율해야 했습니다."

공연 중반, 한 무용수가 의자에 앉아 천천히 허공을 바라본다. 스크린 위에는 그의 얼굴 클로즈업이 흑백으로 비친다. 객석 앞줄에서 한 관객이 조용히 숨을 내쉰다. '기억하고 싶어서 공연을 보는 걸까. 아니면, 제대로 잊기 위해서일까.' 이 질문은 어쩌면 타자의 몫이다.

이 작품은 전시형 공연(Exhibition Performance)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무대와 갤러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무대에 전시된 사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동작의 잔상이며 시간의 압축이고, 영상은 상영이 아니라 또 하나의 퍼포먼스다. 그 안에서 관객은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

장소가 기억을 부른다면, 춤은 다시 태어난다

 스테이지1 공연사진(2024)
스테이지1 공연사진(202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탈극장형' 구조다. 그는 이 작업을 초연할 때부터 극장이 아닌 공간을 염두에 두고 구성했다. 폐공장, 서울역 대합실, 미술관, 혹은 기억이 쌓이는 장소들. 그에게 이 작품은 장소를 선택하는 순간마다 다시 태어나는 생명체다.

"사진과 영상은 공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잖아요. 그러니 장소가 바뀌면, 작품도 바뀌는 거죠. 기억이 장소에 따라 다르게 호출되듯, 춤도 그렇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리허설 중 전환점이 된 건 영화였다. 'The Zone of Interest', 'Playground'. 그는 두 작품의 사운드 구성에서 영감을 얻었다.

"기존 공연에서는 소리를 관객에게 주입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그걸 더 자연스럽게, 공간 안에 스며들도록 하고 싶었어요."

기존의 다채널 사운드 시스템을 넘어서, 특정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자연스러운 잔향과 울림을 구현하는 실험을 반복했다. 마치 '기억의 반향'처럼.

그에게 춤은 기록이고, 동시에 소멸이다. 영상은 남기기 위한 도구이지만, 때로는 잊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는 공연이 끝난 후 어떤 반응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천천히 잊혀졌으면 좋겠어요. 빠르게 소비되지 않고, 오래 여운을 남기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반응이에요."

공연이 끝난 후, 텅 빈 무대. 조명이 꺼지고, 영상이 멈춘다. 그 순간에도 관객의 눈에 남아 있는 잔상이 있다면, 그건 사라지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그리고 전혁진은 바로 그 흔적을 위해 이 모든 질문을 무대 위에 남겨두었다.

〈 Extinction Ver.2 〉는 단순히 보이는 것의 아름다움이나 안무적 경이만을 전달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들의 균열, 잔상, 틈새를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이며, 존재의 불안과 기억의 망각을 춤과 영상의 복합 공간 속에 다시 기록하려는 시도다.
무용 전혁진 현대무용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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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시사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에서 객원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다. 기고하는 언론매체로는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에서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