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스틸컷
20세기 폭스
법정드라마 1인자가 다룬 의료소송과 배심제
주지하다시피 루멧은 영화사를 논할 때 빠져선 안 되는 명감독이다. 또한 법과 정의를 주제로 한 작품에 있어선 가장 앞자리에 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데뷔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이제껏 가장 훌륭한 법정영화라 평가되고, <심판> 또한 그 가치가 수시로 언급되고는 하는 것이다. 당대 명배우 폴 뉴먼이 주연을 맡은 데도, 법과 정의와 관련한 선명한 주제의식에 더해 연출자 루멧의 존재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터다.
<심판>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삶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막장 변호사 갤빈(폴 뉴먼 분)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한때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그는 불의의 사건을 겪은 뒤 일과 가정생활 모두에서 완전한 파탄에 이르렀다. 벌써 반 년 넘게 사건 하나 맡지 못하고 있는 그는 일을 따겠다고 남의 장례식장을 돌며 명함을 내밀어야 할 만큼 궁색한 처지에 있다. 그런 그에게 절친한 친구 미키(잭 워든 분)가 손을 내밀어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지역 유명 가톨릭 병원에서 의료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여성의 사건이다. 영화는 갤빈이 이 사건을 맡아 일류 로펌과 겨루는 과정을 제법 극적으로 그려낸다.
당초 사건은 별 어려움 없이 풀릴 것처럼 보인다. 건강했던 젊은 여성이 식물인간이 되는 과정에 마취약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정황이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이를 증언해 줄 병원 내 의사를 구한 건 결정적이라 해도 좋을 순간이다. 흔한 의료소송 사건에서 그러하듯, 갤빈은 공익제보자를 확보한 순간 승리를 확신한다.
그러나 역시 흔한 의료소송 사건에서 그러하듯, 갤빈의 제보자는 그 약속을 유지하지 못한다. 증언을 해주기로 한 의사는 어느새 상대편에 매수돼 종적을 감추고, 어렵게 확보한 대타조차 여러 결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갤빈은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내부자를 확보하려 들지만, 유력 병원과 로펌에 맞서 증언을 해줄 사람을 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는 판사마저 대형 로펌과 병원에 기울어 있는 상황에서 배심원을 마지막 희망으로 바라보는 갤빈의 고투를 인상 깊게 내보인다.
▲심판스틸컷
20세기 폭스
허술한 각본 감싸는 연출과 연기의 탁월함
<심판>은 장단이 극명히 엇갈리는 영화다. 폴 뉴먼에 앞서 출연이 유력했던 스타배우의 입김으로 각본가가 수차례 변경될 만큼 제작에 난항을 겪었던 게 첫 번째 문제가 됐다. 망가진 변호사가 대중의 호감을 사기 어렵단 이유로 그는 제 캐릭터의 전사를 드러내는 상당한 분량의 에피소드를 추가하려 압력을 넣었다. 훗날 루멧이 서사가 망가진단 우려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캐릭터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본이 고쳐질수록 이야기는 산으로 갔다. 치밀한 법정물이 극적인 대신 현실성을 잃어가기도 했다. 폴 뉴먼이 원안을 본 뒤 참여를 확정하기까지 영화가 본래의 매력을 거의 상실했을 만큼 변질됐단 우려가 나왔을 정도다.
망가진 각본은, 그러나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폴 뉴먼의 연기는 시종 탁월해 그 엉망진창의 캐릭터가 별 부연 없이도 수긍이 될 정도다. 시드니 루멧은 법정에서 변론하는 갤빈의 모습을 흔한 바스트샷이나 클로즈업샷으로 담는 대신, 마치 법정을 그대로 중계하듯 멀찍이서 떨어져 잡기 일쑤다. 폴 뉴먼이 법정 안에 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고 휘어잡는 모습을 모조리 보여주겠다는 듯이. 각본이 다소 망가져 있던 위태로운 상황이 도리어 연출과 연기가 절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게끔 했다. <심판>은 그래서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이루는 역설적 사례의 증거가 된다.
또 한 편으로 다소 허술하게 짜인 재판정에서의 이야기는 배심원제의 본질을 더 극명히 내보이는 계기로 작용한다. 재판장이 사실상 기울어 갤빈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영화는 갤빈이 오로지 배심원들을 최후의 희망으로 두고 그 양심과 정의로움에 기대려 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비춘다. 극적 반전을 노린 단순한 설정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모든 것을 뒤바꿀 수 있는 배심원의 가치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심판포스터
20세기 폭스
OTT에선 못 찾는 영화, 이대로 잃어도 좋을까?
법을 잘 알지는 못하여도 인간다움에 대한 감각이 있기에 배심원이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결말은 이 영화 <심판>을 오늘날까지 유효한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매수로부터, 개인의 독단으로부터, 또 지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판사가 과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배심원보다 누구의 인생을 결정할 자격이 더 있다 할 수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심판>은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의료소송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또 배심원제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한국의료변호사협회는 <심판>을 2025년 한국에서 다룰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에선 합법적인 경로로 보기가 쉽지 않다. DVD를 구입하거나 이를 구비한 영상자료원 및 소수 공립도서관에서 대여하지 않는다면 따로 볼 방법이 마땅찮은 것이다. 한국에서 영업하는 어떠한 OTT서비스도 루멧의 이 작품을 구비하고 있지 않다. 이 영화가 한국사회에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을뿐더러, 영화사에 손꼽히는 명감독의 아카데미 감독상 노미네이트작임에도 말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변호사 중에서도 이에 문제를 느꼈다 전한 이가 여럿이었다.
OTT서비스가 영화를 볼 수 있는 가장 흔하고 강력한 창구로 굳어져 가는 상황에서 소외되는 작품에 대한 인식조차 거의 없는 상황을 나는 불편하게 여긴다. OTT서비스 내에서, 또 그 바깥에서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서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영화 사이의 격차가 분명해진다. 조명 받는 작품이라 해서 마땅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리를 잃어가는 영화라 해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를 나아지게 할 작품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리고 있다. OTT가 가져온 편리함에도 그를 마냥 진보라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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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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