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폭군의 셰프>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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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의 사관은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표현을 사용해 광해군의 최측근인 상궁 김개시의 외모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연산군일기>의 사관은 계층적 관점을 담아 "중인을 넘지 못했다"는 표현을 썼다. 사관들은 군주의 남자 측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록에 잘 남기지 않는 반면, 군주의 여성 측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겼다.
장녹수는 나이만 많은 게 아니라 결혼 경험도 풍부했다. "남편에게 시집가는 게 절제가 없었다"고 위의 <연산군일기>는 말한다. 이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장녹수는 결혼을 꽤 많이 했었다. 인생 경험과 더불어 이런 요인도 장녹수가 연산군을 가스라이팅하게 만든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은 갓난아기 때 헤어진 친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장녹수는 모성애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 연산군을 애인처럼 다루기도 하고 젖먹이나 노비처럼 다루기도 했다. 연산군의 정서를 교묘히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은 화가 많이 난 상태에서도 장녹수만 보면 금세 기뻐하며 웃었다고 한다.
연산군 12년 9월 2일자(1506.9.18.)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매료된 시점은 음력으로 임술년 이후다. 임술년 1월 1일인 양력 1502년 2월 7일 이후였던 것이다.
1502년에 나온 위의 <연산군일기>에는 장녹수가 종4품 후궁인 숙원으로 표기돼 있다. 한편, 연산군 9년 12월 24일자(1504.1.11.) <연산군일기>는 이날 그가 종3품 숙용으로 승진했다고 알려준다. 1502년에 종4품이 되고 1504년 연초에 종3품이 됐던 것이다.
국정에 깊이 개입했던 장녹수
장녹수는 이런 승승장구를 거치면서 국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조정의 인사 문제나 포상·징계·재판 등에도 끼어들었다. 그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왕족의 청탁을 받은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연산군 8년 8월 30일자(1502.9.30.) <연산군일기>는 왕실 종친인 남천군 이쟁이 노비 송사에서 승소하기 위해 장녹수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알려준다.
장녹수가 임금의 관심을 끈 것은 1502년 2월 7일 이후이고, 남천군의 뇌물공여가 실록에 기록된 것은 그해 9월이다. 장녹수의 권력장악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장녹수는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세상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휘둘렀다. 궁궐 밖에 마련된 자기 주택을 확장할 목적으로 그 주변의 민가들을 모조리 철거했다. 또 정부 소유의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 미곡 7천 석을 거래했다. 대중의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국가의 공공기물을 임의로 사용했던 것이다.
장녹수가 연산군을 만난 것은 연산군이 왕이 된 지 6년 뒤다. 이후 연산군은 중종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실각했다. 그 기간동안 장녹수는 연산군의 폭정을 거들면서 자신의 탐욕을 충족했다. 연산군 정권을 침몰시키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던 것이다.
예능인의 길을 걷기보다는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억압하는 쪽을 택한 장녹수는 결국 연산군 정권과 함께 몰락을 맞이했다. 중종이 즉위한 첫날의 상황을 기록한 중종 1년 9월 2일자(1506.9.18) <중종실록>은 장녹수가 "난(亂)의 근본"으로 지목돼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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