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정원스틸컷
찬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관계가 생겨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간다. 때로 알아감은 이해가 되고 애정이 되며 유대며 연대가 이뤄지기도 한다. 주고받는 것이 있고, 함께 간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비밀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하며 다른 무엇에 대한 시선이기도 하다. 영화 속 노인과 아이들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지극히 인간적이며 평범한, 그러나 결코 당연하지는 않은 것들이다. 차라리 우정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 노인과 아이 사이, 좀처럼 이어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사이에서 빚어지는 광경을 관객들은 소마이 신지의 손길이 닿은 작품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이들은 함께 풀이 웃자라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던 노인의 집 마당을 치운다. 풀을 뽑고, 베고, 태워 없앤다. 그러나 오랫동안 감춰졌던 땅이 드러나고 우물도 제 존재를 내보인다. 마당 한 켠에는 아이들이 심고 싶었던 꽃도 심는다. 낡아 무너져 가던 지붕에 색을 칠하고, 쉴 때 함께 마루에 앉아 수박을 썰어먹는 모습도 정겹다. 생선집 뚱땡이 키야마가 노인이 꺼내온 무딘 칼을 보고는 전력으로 내달려 제 집에서 숫돌을 가져오는 과정은 쫓아오는 이가 없는데도 한 편의 추격전 못잖게 긴박하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 누구를 위해 저토록 열심히 뛰어본 적이 언제인가! 그런 반성도.
일견 <여름정원>은 판타지다. 용과 마법사가 나와서가 아니라, 생판 모르던 노인과 아이들이 우정을 쌓는다는 사실이 그렇다. 판타지이기에 소마이 신지는 한껏 대담함을 부려본다. 일어날 일 없어 봬던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감한 영화평론가답게 30여 년 전 제작된 이 영화의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상세한 설명을 더할 수는 없지만, 노인은 한때 전쟁에 나섰던 적이 있다. 그렇다. 태평양전쟁이다. 노인은 이 전쟁에서 저와 제 전우들이 한 일을 소년들 앞에서 털어놓는다. 그는 그대로 영화 <여름정원>의 비기가 된다.
이토록 아름다워 마당 대신 정원이라 쓰기로 한 <여름정원>이다. 가장 찬란한 계절의 정원을 다룬 이 영화가 가장 아픈 시절의 못된 행동을 끌어안은 건 용기다. 무려 1994년 일본엔 이토록 치열하고 진지하게 제 지난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할 줄 아는 이가 있었다. 소마이 신지, 바로 그다.
왜 우리는 하지 못하는 걸까
역사를 공부하는 나는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 참전한 한국이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저질렀단 걸 안다. 수많은 베트남인이 한국군의 총칼과 포탄 아래 쓰러져 죽었다. 한국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던 나라, 그리고 사람들이었다. 지난 시간, 그들의 조상은 중화문화권 동아시아 세계관 아래서 차라리 우방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었는데도 한국은 그저 이익을 좇아 남의 전쟁에 참전해 적을 죽였다. 그리고도 오랜 시간 한국은 우리 병사 한 명이 죽는 동안 베트남 병사 몇이 죽었다는 교전비를 자랑스레 내세웠다. 나는 그와 같은 사실을 자랑스레 언급하는 영화며 드라마를 여럿 알고 있다. 그것이 전개상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그간 직접 몇 차례 베트남을 찾아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벌어진 장소를 돌아보고 추모해왔다. 그럼에도 불편하기만 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국군의 전쟁범죄는 관심 밖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상당수가 한국 인기 여행지 코앞에 있음에도. 예술 또한 마찬가지. 업으로 책과 영화를 찾아보면서도 이를 진지하게 다루고 반성하는 작품을 나는 얼마 보지 못하였다. 하물며 <여름정원> 같은 완성도의 작품이야.
<여름정원>은 노인과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가도록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작품을 보는 이들이 지난 일본의 역사를 알아가도록 한다. 말하자면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가 아니라면 결코 닿을 일 없었을 이해를 말이다. 혐오는 이해가 싹튼 자리에선 피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여름정원>은 혐오에 반하는 작품이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긴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30년을 건너 오늘의 한국에 던지는 물음이 이토록 깊고 정하다. 나는 소마이 신지가 제 때 마땅한 주목을 받는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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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