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의 선율스틸컷
싸이더스
<수연의 선율>은 수연이 고른 선택지를 비춘다. 수연이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된 부부로, 입양한 일곱 살 딸 선율을 키우고 있는 가정이다. 표현성 언어장애가 있는 선율을 입양해 기르면서 아이를 하나 더 입양할 계획이라고. 제법 단란해 보이는 이 가족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수연은 선율 곁에 있는 제 모습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저 꿈만 꾸는 건 아니다. 가까운 동네니만큼 유튜브 영상 속 선율과 그 부모가 오가는 장소들이 수연의 눈에 익어 있는 덕분이다. 수연은 선율이 다니는 어린이집을 찾아 자연스레 접근한다.
영화는 수연이 선율을 통해 부부와 연을 맺고, 자연스레 그들에게 녹아드는 과정을 다룬다. 물론 이야기는 수연의 기대처럼만 흐르지 않는다. 선율의 부모는 수연의 기대처럼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그들이 가진 비밀이 하나하나 드러나는 과정이 무심한 듯 수연을 관찰하는 카메라 안에 그대로 담긴다. 그저 관찰하는 카메라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기댈 곳 없는 수연의 위태로운 상황을, 마치 우물을 향해 다가서는 아이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어른들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수연의 순진한 계획이 그 너머 결코 믿을 수 없는 이들의 어른스런 계획과 부딪쳐 내는 소리는 와장창 유리컵이 깨져나가는 것만큼 새되다.
영화가 다분히 극화돼 있는 건 사실이지만, 수연에게 닥친 위태로움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이다. 기댈 곳 없는 아이에게 세상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친절이란 그것이 간절한 이에게만 한없이 귀하다. 세상의 흔한 친절한 이의 시선에는 수연과 그 세계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 속 수연의 집 문을 두드리는 어른들의 모습처럼. 마찬가지로 수연은 제가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 키 작은 아이에게 어른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화는 유튜버 부부에게 입양된 수연과 선율의 상황을, 또 이들에게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는 구원을 비춘다. 우리가 평범하다 여기는 안전한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이들의 상황이 얼마나 녹록치 않은 것임을 알린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과연 수연과 선율 같은 이가 얼마나 많은가를 상기하도록 한다. 평범은 결코 당연치 않다. 돌봄은 마땅히 더 확장돼야 한다.
의미는 알겠지만, 완성도는 글쎄...
<수연의 선율>이 가진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좋은 작품이라 말하긴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 영화적 선택이 대체로 효과적이지 못하고 상당부분 헤매고 있는 탓이다. 우선 '수연'의 '선율'이란 제목부터가 일종의 반전적 효과를 발휘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알기 어렵다.
사람의 이름 대신 멜로디(melody)를 뜻하는 단어로 생각하기 쉬운 선율을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활용하게 제목에다 붙임으로써 영화는 실제 선율이 등장할 때 관객에게 약간의 충격을 던진다. 그러나 그 효과는 끝끝내 모호하다. 영화 내내 멜로디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심지어 상징적이라 할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나연'이나 '수진'이 아닌 '선율'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또 '수연과 선율'이 아닌 '수연의 선율'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유튜브를 활용하는 방식도 기록할 만하다. 사회적 영향력이 커진 탓으로 여러 영화가 즐겨 사용하는 유튜브는, 그러나 여전히 주의할 만한 소재다. 영화는 선율이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된 부부에게 입양되기 위하여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열세 살 아이가 제 세상 바깥의 사람과 만나는 접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보가 많은 유튜브를 통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설정이지만 유튜브라는 매체를 영화 안에 담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없어 유튜버와 유튜브에 대한 관객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반영하게 하고 만다. 유튜브는 둘 사이의 징검다리일 뿐, 이들이 만드는 콘텐츠며 그를 대하는 자세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시선도 아쉽다. 영화는 주인공인 열세 살 수연의 시선이 아닌, 관찰하는 객관자의 시선에 가까이 서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린애의 시선을 넘어 등장하는 어른들을 총체적으로 비추고 관찰할 수 있는데, 그 효과가 미비하다. 수연을 둘러싼 어른들 가운데 입체적으로 묘사되는 이는 없다 해도 좋다. 처음 교회 오빠가 일종의 위협처럼 등장하는 장면 바로 뒤, 그 아버지인 목사가 더욱 위압적으로 나오는 장면을 붙일 때는 어떠한가. 하나하나 인물의 캐릭터를 형성할 만큼 강렬한 등장과 묘사임에도 영화는 이후 이들을 전혀 비추지 않는다. 일회적 소모로써 구태여 형성한 캐릭터를 상실케 한다. 만약 수연의 시선으로 상황을 보았다면 훨씬 위협적이었겠으나, 카메라는 관찰자와 수연 사이 모호한 지점에 서서 주변인을 강렬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실제 모습은 얼마 조명하지 않는 것이다.
유튜버인 양부모 또한 마찬가지, 그 개성이 뚜렷한 이들이 아이들을 입양하고 다시 방치하기까지에 깔린 사유를 영화는 충실히 살피지 않는다. 수연에게 정보를 주는 사회복지사 등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로 일관한다. 정보를 이처럼 단면적으로 제공하려면 차라리 영화를 철저히 고립된 아동의 시선에서 더욱 가까이 다가가 연출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상황 가운데, 그것도 아동의 입장으로 겪어내야 하는 수연의 제한적 시선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객관자의 입장에서라면 주변 캐릭터를 그저 강렬하게만 묘사하는 것보다 보다 현실적이며 있음직한 개인으로 보여주는 편이 이해를 깊게 했을 테다. 영화가 둘 중 어느 한 쪽을 확실히 택하지 못한 탓으로, <수연의 선율>은 단면적인 작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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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