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가 지난 2024년 7월 2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자료사진).
연합뉴스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김장하 선생이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건넸다는 말이다. 문 대법관이 김장하 장학생 출신이란 사실과 그가 오랜 기간 장학금을 지원받아 판사의 길로 갈 수 있었다는 일화는 계엄과 내란 사태를 거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문형배 대법관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해석을 내놨다.
"제가 선생님께 들은 가장 긴 문장이다. 처음에는 무덤덤했는데, 갈수록 울림이 커지는 거다. 그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냥 눈물이 난다. 가만 생각해보면 선생님 말씀이 선순환 구조다. 선생님께 바로 드리면 플러스 마이너스 해서 제로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주면 그게 돌고 돌면서 계속 더하기가 되니까 승수효과가 난다." (문형배 대법관 <시사인> 인터뷰 중)
선한 영향력이 가져다주는 선순환 구조와 승수효과라니. 돈 안 되는 일에 매진한 김민기도 그런 선순환 구조가 지닌 힘을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후배들과 교감했고, 아동극이 품은 미래 가치를 믿었다. 그런 마음으로 묵묵히 '뒷것'을 자처했던 못자리 농사꾼이었다. 없는 살림에 십 원 단위까지, 단역들까지 철저하게 출연료를 챙겼다는 김민기의 일화는 유명하다.
갈수록 큰 어른의 자리가 절실해지는 시대. 살았던 길은, 종사했던 분야도, 고향이나 지역 모두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회적 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공감, 미래 세대에 대한 긍정적 애정을 통해 그 시대의 갈망을 채워줬다.
아울러 김민기는 광주 5.18과 6월 항쟁을 지나며 애국가를 대체하는 국민 가요가 되어버린 <아침이슬>을 더 이상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크나큰 족적을 남긴 이가 보여준 특유의 겸양조차 범접할 수 없는 귀감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흔치 않은 언론 인터뷰들 중 2018년 <뉴스룸>과 가진 인터뷰 말미, "아침이슬을 빼놓은 김민기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라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김민기는 이런 짧은 대답을 내놨다. 한 문장 안에 '함께'와 '같이'를 연이은 의도에 김민기의 평소 철학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냥 함께 같이 살아가는 늙은이죠, 뭐. 그걸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유효한 김민기의 철학
최근 이재명 정부의 문화체육부관광부(이하 문체부) 후보를 두곤 말들이 많다. 문체부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고 밝힌 인사다. 대통령실은 최휘영 놀유니버스 전 대표의 문체부 장관 인선 배경을 두고 이런 소개를 덧붙였다.
"K컬처 시장 300조 시대를 열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을 현실로 만들 문화체육관광 분야의 새로운 CEO(전문경영인)."
문화예술계에 우려가 드리워졌다. 기자 출신이자 대형 인터넷 포털과 여행 플랫폼을 성장시킨 유통업자라는 박한 평가가 나온다. 재산 공개 직후엔 1% 주식부자가 문화예술 분야를 진두지휘할 철학과 역량을 갖췄는지에 대한 의문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구체적 비전 없이 'K컬처 시장 300조 시대'라는 구호 자체가 플랫폼이나 유통에 초점을 맞춰서는 구호를 위한 구호로 전락할 것이란 예상마저 나온다.
다시 김민기를 생각한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라던 김민기의 철학 말이다. 일찍이 문화예술 융성의 근간을 이뤄야 할 창작 중심과 다양성, 연대의 울림을 실천한 이가 바로 김민기였다.
독일 창작극을 번안한 <지하철 1호선>이 그런 가치 위에서 출발했다. 김민기의 철학 위에 출발해 당시 생소했던 창작 뮤지컬 장르를 동료 후배들과 고생 끝에 개척했다. 심지어 잘나가던 <지하철 1호선>을 그만두고 아동극을 발전시켜나갔다. 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작과 예술, 콘텐츠라는 물건을 쫓았다. 그런 어른 김민기의 철학과 가치는 2025년 현재도 유효할 것이다.
오늘로 그 김민기가 떠난 지 딱 1주기다. 그냥 함께 살아가는 늙은이로 족하다던 김민기, 문화예술계 큰 어른은 작금의 시대를 어떻게 진단했을까. 그의 목소리가, 조용한 미소가 아련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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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니스트 및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전 FLIM2.0,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