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귤레귤레> 스틸컷
인디스토리
02.
출장으로 튀르키예를 방문한 두 사람이 있다. 회사 일은 벌써 다 끝났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다며 3일만 더 있다가 가자며 막무가내인 상사 원창(정춘 분)과 그를 따르는 대식(이희준 분)이다. 또 한 커플이 더 있다. 이혼 후 여행으로 같은 곳을 찾은 알코올중독자 남편 병선(신민재 분)과 아내 정화(서예화 분)다. 병선이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두 사람은 재결합을 목적으로 튀르키예에 왔다.
카메라는 두 커플의 이야기를 공평한 분량으로 교차하며 비춘다. 낯선 나라에서 두 한국인 커플이 우연히 같은 숙소, 바로 옆 방에 묵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전까지다(그 이후에도 투어에 함께 나서며 같은 앵글에 담기기 전까지는 계속된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대식과 정화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친한 사이였지만 정화가 대식의 고백을 대쪽 같이 거절하며 오랫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사실 지금 타국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재회는 모두에게 그리 달갑지 않다. 대식은 당시 징그럽다고 꺼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트라우마가 돼 지금까지 연애 한번 하지 못하게 됐다. 정화 역시 그렇게 고고하게 굴었지만 결국 알코올중독자 남편을 만나 이혼에 다시 재결합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 옆의 또 다른 인물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무너뜨리고 주저앉힌다. 원창은 상사라는 이유로 대식의 트라우마를 은근히 건드려 오고, 남편 병선은 끊임없이 시비를 걸며 여러 사람 앞에서 다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초반부는 지금 대식과 정화가 각자의 상황에서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03.
"한 번만 더 이 난리 치면 재결합이고 뭐고 없어."
같은 투어에 나선 이후 일련의 상황은 두 사람 모두에게 어쩐지 서로의 치부를 들키게 되는 듯한 순간의 연속이 된다. 대식에게는 자신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 대상을 마주함으로써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를 마주해야 하면서도 상사인 원창의 부당한 지시를 (좋아했던 여자 앞에서) 계속 따라야 하는 상황이 놓인다. 정화 또한 마찬가지. 그는 최소한의 품위도 갖추지 못한 전 남편의 민낯을 고스란히 (자신이 거절했던 남자 앞에서) 보여줘야 함과 동시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재결합이라는 현재의 꼬리를 드러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다. 정화는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거절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지만) 무슨 여자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남자의 지나온 과거를 이해할 수 없고, 대식은 (자신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남기고) 결국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 여자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중요한 점은 두 사람만이 그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이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창과 병선, 이들과 함께 투어를 다니는 세 모녀와는 분명 다르다. 세 모녀의 카메라 속에 담기는 내용들을 떠올려 보자. 그 안에는 인물의 내면이 아닌 표피가 기록된다.
▲영화 <귤레귤레> 스틸컷
인디스토리
04.
"니가 내 진심을 때린 거야. 그리고 멍들었고."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두 인물의 화해를 시도한다. 단순히 오랫동안 단절된 관계의 회복은 아니다. 서로에게 감추고 싶었던 사실이 타의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과거와 현재의 상처와 불행이다. 화해의 방식에 있어서도 용서하고 끌어안는 형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놓아주고 떠나보내는 식에 가깝다.
밤새 몇 차례나 서로의 방문을 오가며 밀린 이야기와 애틋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대식과 정화의 모습은 그래서 더 절절하다. 그동안 혼자서는 풀지 못했던 오랜 문제가 타인과의 진실한 소통으로 해결하는 과정처럼 보여서다. 스크린에 적극적으로 투영되는 것은 대식의 과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와 함께하는 동안 또다시 매달려오는 남편 병선으로부터 정화가 벗어날 수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그래서일까.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은 정화가 튀르키예를 떠날 준비를 하고, 전날의 과음으로 투어에서 잠시 빠지기로 한 대식이 처음으로 단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날의 모습들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관문이 된다. 두 사람의 환한 미소와 잠깐이지만 낯선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시간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꼭 두 사람 각자가 이루지 못한 과거와 현실 속 사랑 가득한 연인의 모습을 대신 담아내고 이뤄주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는 듯한 장면들. 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남자와 또 지금 실패한 결혼 생활을 경험하고 또 반복하려는 여자의 사랑이 사실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귤레귤레> 스틸컷
인디스토리
05.
"나 여기 너무 싫었거든 온통 흙빛이어서. 근데 오늘 보니까 좋다."
사실 이 영화는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투어를 보며 하늘로 오르는 열기구의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하는 작품을 찍고 싶었다는 고봉수 감독의 바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셈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는 수많은 열기구가 스크린 위를 수놓는다. 그리고 대식과 정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오랜 시간 헤어 나오지 못했던 과거와 현재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귤레귤레(튀르키예 말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그리고 그런 순간에 끝내 이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감정은 멜로드라마를 처음 시도했던 감독이 작품에 남기는 최대한의 리얼리티가 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공유하기
'모솔' 남자와 '돌싱' 여자의 만남... 과거는 잊으려 합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밴드
- e메일
-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