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질과 데이지>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보호해 주지 못하는 관계자는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해요. 서로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고요. 이거 잘못된 거잖아요."
앞서 이야기했던 이 모호함은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이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하면서 노해를 한 번 더 어려움에 빠뜨린다. 차 사고로 인해 엄마의 맹장이 터지게 되면서 수술 동의서가 바로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지만, 유일한 관계자에 해당하는 소영은 딸 노해가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어떤 측면에서도 보호자의 역할을 할 수 없어서다. 일련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노해는 이 사고가 운전을 강행했던 엄마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소영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데, 이 또한 그가 엄마의 동성 연인이라는 점이 이유가 된다. 그것은 분명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영화의 깊숙한 곳에 놓인 모호한 불편함은 해욱과 소영 사이에 놓인 노해의 시선을 통해 '서로 사랑하는 일이 동성이라는 이유로 미움받거나 소외당하는 이유가 정말 그 자체로 잘못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가닿는다. 여기에 대해 영화가 보여주는 대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사랑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같이 있으면 좋다는 해욱의 말이다.
04.
"가장 문제인 건 네가 겁을 먹고 있다는 거야.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공식 같은 거 말고 시선을 넓혀야 해."
두 번째 만남에서 노해의 주차 연습을 도와주던 소영은 시범을 선보이며 운전하는 동안에 겁을 먹지 않고 시선을 넓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이 표현에서 운전을 사랑으로 치환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규격에서 벗어나 시선을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서로를 보호할 수 없고 지켜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첫 장면인 고해성사의 자리로 되돌아가야겠다. 노해의 고백과 질문 앞에 놓인 신부는 어떻게 적혀 있는가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해가 자신의 세례명을 마르가리타가 아니라 마르게리따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그 가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이든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해도 엄마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제 비로소 명확히 할 수 있게 된다. 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이전에, 그가 책임지지 못한 사고에 대해 비난하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미움이 차올랐던 것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된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낀다. 다가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노해가 놓인 모든 자리,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과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역시 모두 그랬다. 소영에게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걸어 만남을 청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 반짝인다. 단순히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그 형태나 종류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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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