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래곤 길들이기> 스틸컷
UPI 코리아
영리하게 구축된 세계관 위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볼거리를 선보인다. 특히 <드래곤 길들이기>를 상징하는 투슬리스와 히컵의 첫 활공 장면은 압도적이다. 마치 <맨 오브 스틸> 속 슈퍼맨의 비행 장면처럼 흔들리는 카메라는 투슬리스의 속도감을 강조하고, 제삼자의 시점과 히컵의 시점을 오가는 카메라워크는 생동감과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원작에도 참여했던 존 파월의 더 웅장해지고 풍성해진 음악이 더해지면 3분가량 이어지는 활공 시퀀스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경험을 선사한다. <탑건: 매버릭>과 유사한 형태로 특별관의 존재 의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초점이 자주 흔들리다 보니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체적인 쾌감이 그 단점을 상쇄해 주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여러 장면이 원작을 초월한다. 클라이맥스인 레드 데스와의 전투는 레드 데스가 더 거대해지고 위압적으로 묘사된 덕분에 긴박함이 극대화됐다. 또 온 인류와 드래곤의 맞대결이라는 비장미가 더해지면서 슬픔과 감동도 더 절절해진다. 반대로 원작에 못 미치는 장면들도 있다. 일례로 오프닝 시퀀스는 실사화의 한계가 느껴진다. 어두운 화면으로 인해 드래곤들이 버크 섬을 습격하는 액션을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아쉬움이 두드러지는 순간도 있다. 투슬리스가 히컵과 아스트리드를 태우고 오로라를 보여주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본래 아름다운 밤하늘을 함께 날면서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을 보여줘 한다. 그런데 어색한 CG로 인해 배경과 두 주인공이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이 진하다 보니 이 흐름이 순간적으로 끊기고 만다.
실사라서 가능한 감정선
설정과 세계관, 볼거리 못지않게 메시지도 인상적이다. <드래곤 길들이기>의 핵심 키워드는 '소통'이었다. 좀처럼 대화가 안 통하는 부자 관계와 종족을 뛰어넘은 인간과 드래곤의 우정을 대조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공통점과 관심사를 찾고, 상호 존중하면 오랫동안 쌓아온 종족의 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진정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곧 <드래곤 길들이기>였다.
원작의 메시지는 실사영화의 특성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실사답게 크기도 커지고, 위압감이 더해진 투슬리스의 모습은 드래곤과 서서히 우정을 쌓아나가는 히컵의 서사에 몰입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미 관객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투슬리스와 히컵의 관계성을 무리하게 각색하는 대신, 투슬리스와 히컵의 거리감을 부각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한 셈이다.
또 실사영화이기에 히컵과 스토이크의 관계도 더 실감 난다. 그 중심에는 원작에서 스토이크의 목소리를 연기했고, 이번에도 같은 배역을 맡은 제라드 버틀러가 있다. 그의 연기력 덕분에 막상 대화하려고 마주 보면 서로 할 말이 없는 부자의 미묘한 공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 그 결과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익숙해서 더 안타까운 두 남자에게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짧게나마 다른 부모-자식 관계도 비추는 컷도 히컵과 스토이크의 관계성에 깊이를 더한다. 원작과 달리 실사영화는 아스트리드나 '스낫아웃'(게이브리얼 하월)의 아버지도 등장시킨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자녀의 노력, 실패했을 때 그들이 겪는 좌절감과 상실감을 증폭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히컵, 투슬리스, 스토이크의 관계가 더 입체화된 결과 아버지가 아들을 인정하고, 인간과 드래곤이 친구가 되는 변화 또한 더 드라마틱하다.
히컵과 스토이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모와 자녀 관계를 묘사한 대목은 영화 외적인 맥락과 맞물리면서 의도치 않게 더 의미심장해진다. 여러 가족의 공통점이 부각됨에 따라 히컵과 스토이크의 갈등이 가족 내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즉, 히컵과 스토이크의 대립은 새 언어와 상식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가 기존 상식과 관성을 고집하는 기성세대에 맞서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드래곤을 대하는 태도는 이 갈등 구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히컵과 그의 친구들은 드래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언어로 세상에 접근하고, 세계를 이해한다. 드래곤과 우정을 쌓은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평생을 드래곤과 싸운 어른들보다도 그들의 약점을 더 많이 발견한다. 더 나아가 드래곤들의 둥지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인간의 힘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레드 데스와의 전투도 승리로 이끈다.
스토이크와 부모 세대는 다르다. 그들에게 드래곤은 이유 불문하고 제거해야 하는 적일 뿐이다. 뿌리 깊은 적대감과 관습과 한몸이 된 그들에게 인간 대 드래곤의 이분법 외에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이크만 하더라도 온 공동체를 파괴할 뻔한 패착과 위기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히컵의 세상, 드래곤과의 공존이라는 변화를 수용한다.
세상을 새롭게 직시하는 이들과 기존 세계를 유지하려는 이들의 대립. 안타깝게도 이 갈등은 한국 사회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이자, 이미 일부분 현실화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세대에 따라 첨예하게 갈린 정치적 의사가 그 방증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념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의 히컵과 스토이크들이 만들 버크 섬에서 드래곤이 적일지 친구일지는 아직 물음표로 가득하니까.
아류를 벗어나지 못한 모범생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 스틸컷
UPI 코리아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한편으로 공허하다. 실사화 작품으로서는 더 바랄 게 없을 완성도를 보여줬지만, 관점을 바꿔서 보면 명확한 한계점 또한 노출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와는 달리, 상업성을 제외하면 이 실사영화가 필요한 이유를 작품 내에서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 한계다.
그간 디즈니의 실사화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재해석이라는 의도를 꾸준히 제시해 왔다. <알라딘>은 '자스민'(나오미 스콧)'의 주체성을 강조했고, <백설공주>도 그저 주인공의 피부색만 바꾸는 게 아니라 그녀를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물론 그 의도에 관객이 호응할 때도, 안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리메이크 영화의 필요성을 작품 내에서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에 반해 <드래곤 길들이기>는 수익 창출이라는 기초적인 목적 외에 특별한 이유나 의도를 제시하지 못했다. 원작 애니메이션 개봉 후 불과 15년 만에, 3편 개봉 시점 기준으로는 6년 만에 제작된 리메이크이다 보니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명분도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드래곤 길들이기> 리메이크는 아무리 원작의 볼거리, 내용, 메시지를 충실히 재현한 모범생이라 하더라도 결코 아류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첫 실사화 작품이라는 점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충분히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 수작이 아닐까 싶다. 차별점이 부족하다는 단점 또한 첫 시도인 만큼 가급적 안정적으로 원작을 다시 보여주는 데 집중한 대가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드림웍스가 속편이나 다른 애니메이션도 실사화한다면, 그 초석인 <드래곤 길들이기>를 시급히 재평가하고, 추가로 고평가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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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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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보단 영리하네... 드림웍스의 실사영화, 아쉬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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