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귀궁>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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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보호에 대한 인식이 훨씬 희박했던 왕조시대에는 민간인이 전리품쯤으로 취급되는 것은 물론이고 군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보좌한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소개된 일본군 수색작전이 그 시절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유몽인에 따르면, 경기도 양주 홍복산에서는 어린 사람들과 값나가는 재물을 찾기 위한 일본군의 대대적 수색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의경들이 대거 동원되는 오늘날의 야산 수색을 방불케 했다. 유몽인은 "숲속을 빗질하고 김매듯(櫛耨林藪)"이라는 표현을 썼다. 산속에 숨은 사람들과 그곳에 숨겨진 물건들을 찾기 위한 수색 작전이 빗질을 하고 김을 매는 듯이 촘촘하게 진행됐다.
이 수색으로 인해 유몽인의 조카인 유광의 부인이 목숨을 잃었다. 성이 한씨인 이 민간인은 일본군이 퇴각한 뒤 나무에 목이 매달린 상태로 발견됐다. 한씨의 여동생은 다른 지역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서 뛰어가다가 낭떠러지 끝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쟁 초기에 유몽인의 형인 유몽웅은 칠순 어머니를 모시고 양주 선산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만난 일본군은 그의 어머니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유몽웅은 자기 몸으로 어머니를 가린 채 연달아 네 번이나 칼을 맞았다. 그런 상태로 끝끝내 어머니를 지켜내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우야담>은 나라에서 유몽웅을 위해 정려문을 내렸다고 알려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원군인 명나라군에 의해서도 민간인 피해가 대거 발생했다. 명나라 군인들이 말을 탄 채로 민가에 뛰어드는 일도 많았다. 명나라가 참전한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음력으로 선조 25년 6월 20일자(양력 1592.7.28.) <선조실록>은 "군마가 민간에 난입하게 하니, 인민들이 놀라 흩어져 성 안이 온통 비었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소개한다.
집안에 군마를 난입시키는 것이 칼로 사람을 해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민간인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모습은 일본군뿐 아니라 명나라군에서도 나타났다.
유몽인은 광해군과 함께 전시 국가행정에 참여했다.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민간인 피해에 노출됐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전시 민간인 보호의 필요성이 국가적 의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민간인 희생으로 인한 원한은 나라 곳곳에 쌓였지만, 그런 의제가 전쟁 수행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군주는 인간보다 높은 신으로 간주되고 수많은 대중은 인간보다 못한 노비로 취급됐다. 이 같은 불평등 구조도 민간인 보호의 필요성이 덜 부각되게 만든 요인이다.
역사는 '적군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를 군주 평가의 기준 중 하나로 사용한다. 전쟁 같은 재난으로부터 백성을 얼마나 잘 보호했는가는 비중 있게 취급되지 않았다. 이런 일에 신경을 쓰면 "아둔한 놈"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대중 역사서에도 그런 인식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전몰장병뿐 아니라 민간인 희생자 역시 현충일의 추모 대상이 돼야 한다는 인식을 저해하는 역사 서술이 여전히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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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