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소녀> 스틸
슈아픽처스
하지만 그런 코오트에게도 난처한 게 있긴 하다. 아주머니와 달리 남편 션은 무뚝뚝하고 늘 일이 바빠 통 어울릴 틈이 없다. 이 집에 정 좀 붙이고 살 마음도 생겼는데 이 상황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괜히 아저씨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걸어본다. 일찍이 시도해본 적 없는 도전이다.
처음엔 자신을 썩 반기지 않고 애물단지로 여기나 싶어 근심했는데, 사실은 아저씨 역시 말이 없고 표현을 잘 하지 않을 뿐, 아주머니와 환상의 커플이라는 걸 소녀는 조금씩 알게 된다. 인사하면 돌아보지도 않고 '잘 자라!' 한 마디 툭 던지는 식이지만, 은근슬쩍 맛있는 디저트도 남겨둔다. 소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으며 호의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닫는다. 포근한 깃털 이불 속에 꼭꼭 숨은 기분이다. 코우트가 느끼는 감정이 호사스럽다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물질적 배경 차이도 차이지만, 영화는 현미경으로 포착하듯 미묘한 요소를 대비해 주인공의 달라진 환경을 관객에게 주지시킨다. 만삭 엄마는 입덧까지 겹쳐 자녀 도시락 챙길 겨를이 없다. 아빠는 도울 생각 없이 대충 집에 뒹구는 빵 조각 챙기라는 게 전부다. 코오트는 점심시간 맨 빵을 씹다 옆자리 우유병을 물끄러미 본다. 간절한 눈빛이다.
빵과 우유, 당연한 조합도 그녀에겐 보장되지 않는다. 슬픈 표정을 짓다 조심스럽게 딱 한 모금만 몰래 우유를 따른다. 하지만 주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탓에 숨 죽이며 시도한 우유 서리는 엎질러지는 비극으로 끝난다.
잊고픈 체험을 겪은 코오트에게 아주머니는 잠들기 전 따스한 우유를 권한다. 이게 당연한 건데, 정작 소녀는 제대로 누려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아저씨가 송아지에게 분유 먹이는 걸 보며 엄마 소의 우유는 왜 안 주냐고 의문을 품는다. 우유는 팔기 위해 가져간다고, 대신 태어난 직후엔 충분히 먹인다는 답에도 소녀는 우유를 송아지가 먹길 바란다.
그녀만의 특별한 경험, 누구에겐 당연한 게 누군가에겐 보장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 그리고 결핍이 어릴 적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아는 이라면 한 장면 한 장면 스칠 수 없다.
그런데 이상적인 부부이자 '어른'으로 생각하던 킨셀라 가족 역시 상처와 결핍이 존재했다. 동네 아주머니 수다 때문에 소녀는 우연히 그들의 깊은 상실감을 알아채고 만다. 자신이 누리는 지금의 행복을 잃기 싫다는 욕망이 어쩌면 은인 같은 부부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자신이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다. 아이의 특권인 응석이 아닌, 가족 일원으로 당연한 역할을 자각한 셈이다. 그게 당연한 도리다. 그렇게 여름 동안 소녀는 키만큼 정신도 성장한다.
아
일랜드 문화와 사회를 사실주의 풍경화처럼
작품 시대 배경은 1981년 여름이다.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작에선 명백하다. 코오트가 다니던 학교 교실엔 아일랜드 지도가 붙어 있다.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포괄한 전도다.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작가와 영화의 확연한 정체성인 셈이다. 소설에선 아저씨가 식사 중 뉴스를 보며 북아일랜드에선 감옥에서 단식하다 사람이 죽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사치한다며 언급한다. 그해 3월부터 200일 넘게 벌어진 IRA 단식투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디테일'이 넘쳐난다.
자신의 집에선 듣도 보지도 못한 살림살이를 목격하며 코오트는 아주머니에게 무심코 '티르 너 노그' 같다고 말한다. 아일랜드 신화에서 일종의 '이상향'이자 '젊음의 땅'이다. 냉장고를 처음 보고, 여기 식품을 보관하면 상하지 않고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설명에 바로 떠올릴 정도면 그 동네에선 보편 상식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반지의 제왕> 작가인 톨킨의 중간계 세계관에서 신들의 낙원 '발리노르' 유래가 된 지명이다. 아일랜드 문화에 관한 자부심 넘치는 인용 아닌가.
낙농업이 발달한 아일랜드를 과시하듯, 목장 풍경이 펼쳐진다. 식민지 시절 수탈 때문에 먹을 게 없어 주식이 된 감자는 내내 식탁에 등장하고, 코오트는 아주머니와 함께 감자 껍질 벗기며 친해진다. 기네스 흑맥주 본산답게 아빠 '댄'은 내내 술에 절어 있고, 션 아저씨는 코오트에게 맥주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내리면서 정작 자신은 친구들과 카드놀이하며 맥주를 즐긴다.
아일랜드 아침 식사 문화나 제빵에 열중하는 아주머니 일상 역시 고국 생활문화를 자연스럽게 독자·관객에게 각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루바브'나 '구스베리 잼' 같은 우리에겐 생경해도 아일랜드에선 익숙한 음식들 덕에 '먹방' 장르로 비칠 정도다.
여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관객이 봤듯, 소녀는 생에 처음 맛보는 가족과 일상의 기쁨을 온전히 경험했다. 잘 보살핀 작물이 여름 비와 햇볕에 몰라보게 성장하듯, 소녀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필사의 선택을 감행하기로 한다. 단지 자기 처지를 개선하기 위함은 아니다.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인생인데, 자신만의 '티르 너 노그'를 찾았건만 없던 일로 포기할 순 없다.
과연 주인공은 집으로 얌전히 돌아가야만 할까? 하지만 소녀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직선처럼 흘러가는 영화를 눈으로 봐야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면 이제 소설을 다시 읽을 시간이다. 아련하고도 흐뭇한 영화를 다시 만날 때가 도래한다.
▲<말없는 소녀> 포스터
슈아픽처스
[작품정보]
말없는 소녀
An Cailín Ciúin
The Quiet Girl
2022|아일랜드|드라마
2025.06.04. (재)개봉|95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 콤 베어리드
주연 캐서린 클린치
원작 클레어 키건 - 소설 《맡겨진 소녀》
수입/배급 슈아픽처스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 특별언급, 대상-국제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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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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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보다 잘해주는 친적집... 돌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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