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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세력 위한 공간으로 변질, 야스쿠니 신사의 '광기'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25.05.21 16:49최종업데이트25.05.2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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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도쿄에 위치한 종교 시설로 본래는 수천년에 걸쳐 일본의 전통문화와 민속신앙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일본이 벌인 각종 전쟁에서 숨진 전사자와 전쟁범죄자들까지 합사하면서 현재는 국제적인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장소로 변질됐다.

일본은 왜 국제사회의 반발 속에서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일본의 민속신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게 었을까. 5월 2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일본 민속 신앙이 야스쿠니로 변질된 이유'편이 그려졌다.

일본 민속 신앙이 변질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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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 신도(神道)는 고대 일본에서 기원하는 민속 신앙과 자연 신앙, 조상 신앙 등에 기반한 민속 종교다.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자연과 자연재해에서 조상과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 모두 카미(かみ,신)가 깃들어있다고 믿으며 숭배했다.

신도는 다른 일반적인 종교와 달리 내세관, 교리, 교주 등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신도는 문헌이나 의례, 계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심정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분석한 연구도 있다. 2022년 일본의 문화청이 발표한 종교별 신자 비율에 따르면 신도를 믿고 있는 인구가 51.1%로 불교(43.4%)를 제치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신들을 모시는 장소가 바로 신사(神社)이며, 그중에서도 황실과 관련된 신을 모시는 곳은 신궁(神宮)으로 불린다. 일본의 신사는 전국에 약 8만개가 넘는다.

아마테라스는 일본의 태양신으로 수많은 신도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주신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아마테라스가 일본을 건국하고 천황가의 시조가 되는 조상신이 되었다는 건국 신화를 만들어냈다.일본의 40대 텐무 천황은 673년 즉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국 역사서가 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민간에서 전승되던 신도의 신화를 짜집기하여 자신을 아마테라스의 후손임을 표방하여 자신과 천황가의 권위를 높였다. 이후 신도는 불교와 융합하면서 일본 전역으로 크게 확산된다. 신의 자손이라는 명분을 기반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가 일본에 정립된 계기였다.

하지만 12세기 후반 가마쿠라 막부를 시작으로 무사 계층이 일본 전국을 장악하는 사무라이(막부) 정권의 시대가 열리면서 약 7백여년간 천황은 상징성만 지닌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천황의 권위와 신성성을 상징하던 신도는, 사무라이 정권 아래서 한동안 서민들을 결집시키는 민속 신앙의 역할로 돌아갔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며 일본의 역사에 또다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사무라이 정권이 몰락하고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메이지유신 세력은 분열된 일본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민속 신앙인 신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일본은 신의 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국가이며 신민은 신성한 권위를 가진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 바로 '국가신도'의 탄생이다. 이는 훗날 야스쿠니 신사가 탄생하게 되는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된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정부는 천황의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인 '욱일기'를 만들어낸다. 아침에 솟는 해가 뻗어나가는 모양을 상징한 욱일기는, 천황이 태양신의 후손이라는 건국 신화에서 착안한 것으로, 당시 일본군에게는 천황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었다. 이어 메이지 유신 정부는 '신불 분리령'을 내리며 천황의 권위 확립을 위하여 신도를 보호하고 불교를 탄압했다.

그리고 이러한 메이지 유신 정부의 천황숭배 작업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것이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이 되는 '도쿄 초혼사'의 건립이다. 유신 정부는 장기간의 내전에서 전사한 천황군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제사공간으로 초혼사를 건립하며,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장소로 활용했다. 1874년에는 메이지 천황이 방문하여 전사자들을 위하여 참배한 것을 계기로, 도쿄 초혼사는 일약 천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가적 신사로 위상이 높아진다. 1879년 6월 도쿄 초혼사는 오늘날의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야스쿠니는 일본어로 '국가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천황을 향한 충성심을 키우기 위하여 국가 신도를 생활규범처럼 주입한다. 1890년 발간한 '교육칙어'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지켜야 할 교육 방침을 정리한 문서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숭배를 국민의 의무라고 세뇌하는 내용이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일본 정부는 천황의 신격화를 위한 새로운 신사 건립을 추진하여 메이지 신궁을 건설한다. 이처럼 일본은 천황 숭배를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 상징물들을 건립하여 천황을 신격화하는 국가신도 사상을 학립했다.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에서도 일본은 국가신도 사상을 식민지 동화정책에 이용했다. 일본은 남산 일대에 조선신궁을 건설하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추대하고 조선의 정체성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했다. 조선신궁을 시작으로 한반도 전역에 1천여개가 넘는 신사가 건립됐고, 조선인들은 강제로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며 거부하는 이들은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후에야 조선신궁은 철거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립투사인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설립됐다.

일본은 야스쿠니로 대표되는 국가신도를 전면에 내세워 침략전쟁을 위한 병력동원에도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천황을 위하여 죽는 것은 숭고한 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국과 식민지 백성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일본은 팔굉일우(천하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쇼와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나라와 민족을 일본이 품는 것이 사명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일본은 무모하게 일으킨 2차대전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집단적 광기에 빠져 자폭 전술들을 불사하며 최후의 저항을 벌였다. 가미카제(비행기), 가이텐(어뢰), 신요(소형선박), 후쿠류(인간 기뢰) 등 폭약을 설치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적진에 뛰어드는 '자살 특공'이 성행한다. 이러한 자폭특공대가 가능할수 있었던 기반에도 종교적인 세뇌가 있었다. 일본군은 '천황을 위하여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서 신이 되어 영원한 평화를 누릴수 있다'며 병사들을 자살로 내모는 가스라이팅을 일삼았다. 또한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다수의 조선인들도 원치않는 자살특공의 희생양이 되어야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만들어낸 광기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약 210만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전사자의 유족들도 야스쿠니에 합사된 가족의 죽음을 오히려 '국가를 위한 영광'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의 일본 사회 전반이 야스쿠니 신사가 만들어낸 광기의 정서에 얼마나 물들어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이 패망한후, 미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킬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에 천황 숭배 기반의 국가 신도 체제에 있음을 간파해다. 맥아더는 국가신도와 야스쿠니를 금지시켰고, 미군정에 의하여 국가신도가 해체죄면 야스쿠니는 민간 종교법인으로 전락했다.

침략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인물들은 도쿄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들로 지정되어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후 냉전시대에 접어들며 1952년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면서 종신형을 받은 전범들이 대거 가석방되면서 처벌을 받은 전범은 소수에 그쳤다.

이후 일본에서는 다시 과거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극우세력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기 위하여, A급 전범들조차 조국을 위한 충신으로 둔갑시켜야했다. 이를 위하여 추진된 것이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대부터 우익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1978년에 A급 전범 14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여 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침략전쟁의 피해국이었던 한국과 중구, 타이완 등에서 강제로 징병되어 희생된 사람들도 당시 천황의 군대에 속했다는 이유로 유족의 동의없이 합사됐다. 이 사건은 당시 국제적으로 큰 논란을 초래했고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이 있었다. A급 전범의 유족들마저 합사에 동의한 적이 없다며 반대했을 정도였다. 합사 이후 일본 천황들은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지금까지 합사된 246만명이 넘는 전사자가 '하나의 신'으로 합쳐져 있으며 '한번 합사한 영혼은 분리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합사 취소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2013년 한국인 유족들은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합사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일본 사법부는 이를 기각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극우세력의 전쟁 미화를 위한 공간으로 변질됐다. 야스쿠니에서는 태평양전쟁에서 사용된 무기들을 기념으로 전시하는가 하면, 전쟁의 책임을 반성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희생만 부각시키며 침략전쟁을 미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2020년대에도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이를 옹호하는 언행을 거듭하며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을 자아내고 있다.

'인간에게는 회복력이 있으니 그것을 믿을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대문호 오에 겐자부로의 격언이다. 일본의 신도는 자연과 조상을 섬기는 순수한 믿음에서 출발했으나. 정치및 권력과 결합하면서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일본 사회 곳곳에 남아 게속되고 있다. 야스쿠니를 일본 극우들의 주장처럼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의도를 함께 이해하는 시선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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