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월 이야기> 스틸
미디어캐슬
4월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문장은 역시 T.S 엘리엇의 것일 테다. 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 가운데 유달리 널리 알려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란 머리구절이다.
이 시는 다분히 이색적이다. 어느 각도로 보아도 4월은 아름답지 아니한가. 날씨 궂기로 유명한, 시인이 각별히 애정한 저 영국에서조차 그러하다. 시인 또한 그를 잘 알았다. 다음 문장이 어떠한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자라나고, 기억과 욕망이 뒤섞이며, 봄비가 둔한 뿌리를 휘젓는다. 죽음에서 생명이 피어나고,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태어나 요동치지 않는가. 세상 온갖 아름다움이 태동하는 이 나날을 가리켜 시인은 잔인하다고 지적한다. 그것도 가장.
망각의 눈이 대지를 뒤덮었던 겨울이 차라리 따뜻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어차피 녹을 눈이지만, 마침내 드러날 대지임에도, 그 순간의 휴지가 자비롭다 여긴다. 1차대전의 후유증으로 고전하던 유럽이다. 그 폐허 가운데서도 다시 움트는 생명을 시인은 목도했다. 4월은 어째서 잔인한가. 그건 마침내 사멸한 모든 아름다움이 움트는 달이기 때문은 아닌가.
찬란해 잔인한 달, 4월의 영화
4월을 맞아 한 편의 영화가 재개봉했다. < 4월 이야기 >, 이와이 슌지의 1998년 작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돼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국민의정부부터 참여정부가 순차적으로 진행한 일본 대중문화 수입철폐 정책 덕분에 조금 늦은 2000년 4월 처음 한국에서 개봉했다.
<러브레터>를 감독한 이와이 슌지는 세기말 아날로그적 감성을 대표하는 창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21세기 들어 <릴리 슈슈의 모든 것>부터 <하나와 앨리스>, <립반윙클의 신부>, <키리에의 노래>에 이르는 필모그래피가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세기말까지의 그는 싫어하는 이를 찾기 어려운 독보적 감성의 소유자였다.
< 4월 이야기 >는 <러브레터>와 함께 이와이 슌지의 세기말 아날로그적 감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감성의 결 또한 상당부분 닮아 있다. 영화는 2013년 4월에 한 차례 재개봉했고, <러브레터>가 무려 9번째 재개봉에서 11만 관객을 모으는 대성공을 거둔 올 4월 다시금 관객들과 만났다(관련기사:
너무 일찍 떠난 그녀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https://omn.kr/2bbc9).
서두에서 소개한 T.S. 앨리엇의 시는 이 영화와 각별히 어울린다. 황량하고 잔뜩 얼어붙은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이 시와 절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이 영화 사이엔 상당한 거리감이 있지만, 4월을 바라보는 마음만큼은 어딘지 통하는 구석이 있는 때문이다. 왜 아닐까. < 4월 이야기 >의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자라나고, 기억과 욕망이 뒤섞이며, 봄비가 둔한 뿌리를 휘젓는 '바로 그 계절이다. 마침내 스러질지라도, 일단은 머리부터 들이밀고 보는 철없는 치들의 박동하는 계절이다.
일본의 4월은 각별하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벚꽃이 어디에나 흐드러지게 피고 지며, 그를 배경으로 자라나는 젊은이들이 각급 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이한다. 시작과 태어남을 상징하는 이 계절에 청춘남녀들의 사랑과 우정, 도전과 성장 또한 이뤄질 것을 구태여 더 길게 적을 필요는 없을 테다.
영화의 주인공 우즈키는 각별히 매력적인 여배우 마츠 다카코가 연기했다. 우즈키는 대학교 신입생이다. 고등학교까지 나온 홋카이도를 떠나 도쿄 근교의 대학에 진학했다. 가족을 떠나 홀로 도쿄 교외 무사시노에 집을 구하는 모습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우리네 청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다시 고등학교까지 진학하는 것과, 집을 떠나 대학교가 있는 도시로 터전을 옮긴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새로 시작되는 건 학교가 아닌 삶, 그 자체다.
"홋카이도 출신이고 성격은... 밝은 편이야. 취미는... 음악 감상. 잘 부탁해."
영화는 우즈키가 겪는 일련의 처음들을 비춘다. 소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그러나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반짝이는 처음들이다. 자전거를 사고, 혼자 영화도 본다. 이웃집에 사는 요상한 여자를 만나고, 도대체가 이상한 구석 밖에 없는 플라잉낚시 동아리에 가입한다. 그리고 서점, 무사시노도라는 서점에 자꾸만 찾아간다.
선배를 만나러 2000리를 건너왔어요
▲영화 <4월 이야기>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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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우즈키의 사랑이다. 사실 우즈키가 집을 떠나 멀리 도쿄까지 온 데는 다른 무엇보다 사랑이란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터다. 고등학교 시절 마음에 품었던 남자 야마자키(타나베 세이이치 분)가 우즈키보다 먼저 도쿄에 왔다.
고등학교 1년 선배인 그는 밴드부에서 활동하며 꽤나 유명했던 모양. 그 또래 여학생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다 했다. 인기의 비결이 연주실력 때문은 아니란 걸 그를 본 모두가 알 수 있을 테다. 긴 머리 찰랑이며 해사한 웃음을 웃는 잘 생긴 청년에게 연정을 품는 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그 다음엔 여름이 대기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워 보인다.
'넓은 들판에서 기타를 치는 선배의 모습이 내 마음 속의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림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의 우즈키는 오래 짝사랑한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마구 뚝딱여버린다. 운명처럼 그가 도쿄에서 일하고 있다는 서점을 안 그 순간부터, 우즈키는 도쿄행을 꿈꾸었다. 그녀에게 도쿄는 야마자키 선배가 있는 곳, 그가 일하는 무사시노도 서점이 있는 곳, 그가 걷고 먹고 일하고 자며 가끔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도시다. 그로부터 우즈키의 시간은 무사시노도에 가기 위한, 무사시노도가 있는 도쿄에 가기 위해 바쳐졌다.
그리고 그녀는 해냈다. 그가 다닌다는 무사시노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그렇게 서점까지 왔건만, 말하자면 그녀의 자취방부터 서점에 이르는 단 몇 분, 몇 킬로미터의 거리가 아니라 반년이 넘는 수험생활과 홋카이도부터 도쿄까지 2000리가 넘는 길을 건너왔건만, 그녀는 입도 뻥끗 못하고 수많은 손님 중 하나가 돼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돌아갈 뿐.
그러나 세기말 이와이 슌지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즈키에게 세계 영화사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우산 신을 안겨준다. 말하자면 <사랑은 비를 타고>의 빗속 접힌 우산과 <쉘부르의 우산>에서의 항공신으로 비추던 우산들의 행렬, <클래식> 속 손예진이 가게 언니에게 건네는 우산과 요물 같은 미모의 강동원이 슬쩍 올리던 우산들 사이에 우즈키의 큐피드 화살 같은 우산이 자리하는 것이다. 야마자키가 우즈키를 알아보았던 그날, 그러니까 무슨 봄비가 장마철 폭우처럼 끝도 없이 퍼붓던 그날, 우즈키의 사랑은 마침내 다음장으로 건너간다.
러닝타임 1시간을 조금 넘는 중편영화다. 우즈키의 짝사랑이 마침내 사랑으로 화할 듯한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시작한 사랑이 마침내는 끝나리란 걸 모두가 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기까지의 해피엔딩조차 엔딩이 아니던가. 말하자면 모든 사랑은 끝이 난다. 태어난 모든 것이 마침내는 사멸하듯. T.S. 엘리엇적인 시각에선, < 4월 이야기 > 또한 잔인한 영화다. 아름다울수록, 찬란할수록, 반짝일수록 그러하다.
그러나 그 잔인함을 나는 아름다움으로, 찬란함으로, 반짝임으로 여긴다. 우즈키의 사랑이 벤츠인 줄 알았는데 똥차였음을 알게 되는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진절머리나는 연애 가운데 울고불고 복장 터지는 날들이 거듭될지라도, 귀하고 어여쁘게 사랑하고 혼인하다 해피엔딩에 이를지라도, 그녀와 그가 더없이 화사한 4월을 겪었단 건 변치 않을 테다. T.S. 앨리엇이 이 영화를 보았대도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적었을까. 내 앞에 그 같은 이 서있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더라고 최대한 우겨볼 테다.
▲영화 <4월 이야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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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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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끝나기 전에 보면 좋을 사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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