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N 플러스 <허식당>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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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광해군에게 발등이 찍힌 일곱 서얼은 1613년에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을 무대로 조직을 결성한다. 그런 뒤 소금상인이나 나무꾼 등으로 위장하고 금품 강탈 등을 저지른다. 충북과 경북을 잇는 조령(새재) 고개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는 사건도 벌인다. 그러다가 포도청에 의해 일망타진돼 감옥에 갇히는 '칠서의 옥(獄)' 혹은 '칠서지옥'의 주인공들로 세상에 알려진다.
엉뚱하게도 광해군 정권은 이 사건을 공안사건으로 비화시켰다. 정권 실력자 이이첨은 일반 형사사건인 이 문제를 역모사건으로 조작해 '서얼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사건을 키웠다.
광해군의 여당이자 북인당의 분파인 대북당은 이 사건을 지렛대 삼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다수 세력인 서인당을 대거 숙청했다. 영창대군은 서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보냈다. 계축년인 1613년에 발생해 대북당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활용된 이 사건은 계축옥사로 불린다. 영창대군은 이듬해에 목숨을 잃었다.
계축옥사의 빌미가 된 칠서의 옥은 서얼 차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 광해군 정권은 이런 사안을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자 광해군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서얼 문제를 이렇게 왜곡시킨 것은 서얼 차별에 대한 광해군 정권의 개혁 의지가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칠서 중 1인인 서양갑의 형이자 그 집안 적자인 서용갑이 의금부로 보이는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이 광해군 5년 5월 3일자(1613.6.20.)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공부 열심히 해서 과거에 응시하라는 이복형 서용갑의 충고에 대해 서양갑은 공부는 해서 뭐하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서양갑은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해도 성균관에 입학하기 힘들고 대과에 급제해도 해미현감 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부·목·군·현의 2급인 목사를 지낸 아버지 서익과 달리 자신은 잘해봤자 충청도 서산의 해미현감밖에 못 될 것이라며 공부를 게을리했다.
서용갑의 진술에서 나타나듯이 광해군 시대에도 서얼들의 과거 응시는 가능했다. 다만, 지방 수령이 된다 해도 작은 고을을 전전하기 쉬웠다. 서용갑을 비롯한 칠서들이 희망한 것은 그 이상의 대우였다.
역설적이게도, 서얼문제는 서얼 임금을 몰아낸 인조 정권에 의해 훨씬 더 개선됐다.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 정권은 쿠데타 2년 뒤인 1625년에 서얼 출신이 호조·형조·공조의 정랑(정5품)이나 좌랑(정6품) 등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허통사목을 시행했다. 서얼 차별로 인한 논란과 개혁 조치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권층 자제들의 문제라 정치적 주목은 쉽게 받지만 대중적 호응이 따르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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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