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룸 넥스트 도어> 스틸컷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마사의 마지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찬란했다. 노란 슈트를 입은 채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떠난 마사는 안락해 보인다. 너무나 생생해 죽음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을 상상하는 빛은 잿빛이겠지만, 그녀와 주변 어디에도 암울한 기미는 없다. 개나리처럼 노란 슈트, 그녀가 누워있는 붉은 선베드, 한 번도 헤엄쳐보지 못한 푸른 수영장, 선베드에서 조망되는 울울한 초록 숲까지, 죽음을 은유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마사의 존엄사는 나도 저렇게 죽고 싶다는 철딱서니 없는 상상을 자아낼 만큼 우아하고 청결하다. 영화 내내 투병으로 파리해진 마사 말고는 모든 공간적 배경이 화려하고 생생한 색들로 채워졌다. 이는 침울한 죽음에 대한 완벽한 역설인 동시에 그가 취한 죽음의 방식이 보통 인간이 누릴 수 없는 어떤 경지임을 함의한다. 누구나 마사처럼 존엄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진실을 일깨운다.
나는 이 영화를 존엄사에 대한 영화로만 보지 않았지만 결코 이 주제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사의 존엄사와 대비되는 외롭고 비참한 마지막은 지구 어디에나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 플랜 75 >가 보여주는 죽음 권하는 사회는 '미끄러진 경사길'에서 떠밀려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소외될 유사 존엄사를 예견한다. 사회 전반이 양극화로 불평등이 심화되는 지구에서 보통 사람이 조마조마하며 맞닥뜨릴 최후는 마사의 존엄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암시한다.
얼마 전 남유하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고 착잡했다. 말기 암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는 저자 엄마의 소원은 어서 고통을 끝내는 것, 해서 딸인 저자는 엄마의 선택을 조력하기 위해 함께 스위스로 떠났다. 나는 저자처럼 용감할 수 없지만 그의 조력을 존중한다. 하지만 한국에도 시급히 존엄사가 합법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고통이 극심하고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라는 전제가 확고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위스나 캐나다는 존엄사를 합법화했다. 저자가 소개한 캐나다의 경우 2022년 기준 인구의 4.1%가 조력 사망으로 떠났다. 4.1%는 2022년 기준 캐나다 인구 약 3900만 명 중 16만이 넘는 수치다. 캐나다 정부로서는 의료비 삭감의 현저한 효과를 보겠지만, 나는 어쩐지 16만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6만이 넘은 조력 사망이 온전히 자신만의 결정과 선택이었다는 것이 영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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