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
KBS1
'술로 쓰린 창자를 푼다'라는 뜻의 한자는 '해정'(解酊)이다. 그런데 이 '해정'의 한자어가 훗날 '해장국'이 됐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며 찾아든 외국인들, 이들은 주로 쇠고기의 안심·등심 등 주요 부분을 많이 먹었고, 내장, 잡고기, 뼈 등이 남게 됐다.
주변 식당에서 이것을 이용해 국을 끓였는데, 노동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술 마신 다음 날 숙취 해소에 최고여서 해장국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일찍이 귀한 단백질을 여럿이 나누어 먹기 위해 '탕'이 고유한 음식으로 자리잡은 우리네 음식 문화에서, 해장국 한 그릇은 탕 문화의 산업사회적 진화인 셈이다.
경제 개발과 함께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 빨리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든 음식 중에 해장국만한 게 있을까. 도축장 근처에서는 싱싱한 선지, 돼지 잡뼈, 등뼈, 양선지 등 고기 부속물 등과 채소들이 어우러져 한 그릇의 해장국으로 탄생됐다. 지역에서 인기를 끌던 콩나물도, 복국, 북엇국도 지역민들과 함께 상경했다. 고된 노동을 달래주던 한 잔의 술과 함께, 동반자처럼 허한 속을 풀어주던 한 그릇의 해장국이야말로 노동 현장의 오랜 동반자다.
IT기업에 다니는 최상률씨는 어제 회식의 숙취를 해장국 한 그릇으로 풀며 오늘의 회식에 만전을 기한다. 이처럼 노동주의 후일담으로, 혹은 또 새로운 노동주의 파트너로 해장국은 그 위상을 드높여 왔다. 하지만 해장국이 숙취해소제로만 자리매김하는 건 한정적이다.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골절 환자까지, 오늘 하루 3번째 수술을 마친 정형외과 의사 김형년씨의 쌓인 피로를 푸는 것 역시 해장국이니 말이다.
과로와 과음이 뒤엉켜 버린 영등포 거리의 밤을 지키는 경찰들이 12시간 만에 먹는 첫 끼는 따뜻한 라면 국물이다. 24시 무인 라면 가게, 이제 라면은 어엿한 해장국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도시의 밤이 편리해질 수록 누군가의 밤은 그 도시를 밝히는 노동으로 채워져 간다.
남구로 역에 몰려 도시의 새벽을 깨우는 1000 명에 가까운 이들, 전국 어디라도 좋다지만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이 일자리를 못 구하고 돌아서야 한다. 오늘도 허탕친 박요남씨는 현장의 짬빱치고는 짧다는 20년 경력이다. 목포에서 장거리 화물을 하다, IMF로 그만두고 노동일을 배웠다는데, 이제 경기가 안 좋아 그마저도 내일을 모르는 처지다. 그들이 모여든 순댓국집, 오늘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만 원짜리 순대국 한 그릇의 선택이 얼마나 고민됐을까.
다큐는 밤을 세워 문을 여는 해장국집과 사람들이 즐겨 먹는 해장국을 통해 밤을 세워 일하는 이 시대 노동 현장을 탐사한다. 평범했을 뻔한 다큐는 그들이 뜨는 해장국 한 숟가락이 더해지며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로 변모한다. 그리고 선지, 순대, 뼈, 콩나물 등 해장국의 종류 만큼이나 다양하게, 수많은 인간 군상이 도시의 밤을 자신의 낮으로 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전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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