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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만든 구원의 길

[리뷰] <검은 수녀들>

25.01.31 15:09최종업데이트25.01.3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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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이름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 될 모든 이야기와 감정이 스며든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내 이름이 불린다는 행위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름이 없다면 나 자신을 정의하기도 어렵고, 타인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키기도 힘들다. 결국 이름이란, 우리 내면을 드러내고 서로를 구분 짓는 뿌리이자, 한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시로 존재한다.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 우리는 유니아·미카엘라·바오로라는 '이름'을 지닌 세 인물을 만난다. 수녀이자 신부인 이들이 각각 품고 있는 절망·죄책감·후회는 각자의 이름 속 정체성을 흔들고 시험한다. 어둠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구마 의식을 둘러싼 제한과 의심 속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에 걸린 책임과 소명을 다시금 떠올린다. 과연 절망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을까, 후회가 도움의 손길로 바뀔 수도 있을까. 다음부터 살펴볼 세 가지 감정은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치는 출발점이다.

[첫 번째 감정]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영화 <검은 수녀들> 장면
영화 <검은 수녀들> 장면(주)NEW

유니아 수녀의 과거는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반응하는 방식에서 그녀가 깊은 절망감 속에 있다는 게 드러난다. 그런 와중에도 유니아 수녀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돕고 구하려고 애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녀의 절망감이 오히려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마주할 때조차, 그녀는 흥분하기보다 담담하게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태도가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이유는 유니아 수녀가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을 띠면서도, 막바지까지 타인을 위해 구마 의식에 나서는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보여준다. 절망감은 흔히 사람을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유니아 수녀는 그 절망 위에 일종의 '책임감'을 덧씌워,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더욱 단단히 다진다.

영화는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며 '투쟁심'을 끌어내는 걸로 묘사한다. 실제로 그녀가 처한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구마 의식은 허가받은 신부만이 거행할 수 있는데, 유니아 수녀는 이 제약을 뛰어넘을 만한 권한도, 신분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사람을 구하고, 악령을 막아내려 애쓴다. 이런 모습은 절망을 극복하는 데 있어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두 번째 감정]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영화 <검은 수녀들> 장면
영화 <검은 수녀들> 장면(주)NEW

영화 곳곳에는 미카엘라 수녀가 어릴 적부터 죽은 이들을 보아왔다는 암시가 있다. 그녀는 친구의 환영을 지금도 계속 목격한다. 이상한 기운이나 귀신 같은 존재가 주변을 맴돌면, 미카엘라 수녀가 금방 눈치채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질병'으로 치부하며, 외면하려 든다.

아마도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현재 그녀를 마비시키는 것 같다. 친구 대신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한 부채감, 무엇인가 바꿀 수 있었을 텐데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다. 미카엘라 수녀는 그러한 마음의 짐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 하고, 수동적인 태도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유니아 수녀를 만나면서부터 그녀는 조금씩 변화한다.

죄책감은 사람의 행동을 옭아매는 강력한 감정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처벌하려는 듯한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으로 이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만, 유니아 수녀를 통해 '죄책감이 나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면,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자각한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뒤로 숨지 않고, 마주 보려 한다. 이 과정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사실은 새로운 결심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세 번째 감정] 바오로 신부의 후회

 영화 <검은 수녀들> 장면
영화 <검은 수녀들> 장면(주)NEW

바오로 신부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인물임에도, 의외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는 '정신병 같은 건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구마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존재가 바오로 신부다.

흥미로운 건, 바오로 신부가 결단을 내린 뒤의 모습이다. 영화는 이 과정 자체를 상세히 보여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구마를 돕는 인물로 바뀐다. 바오로 신부가 할 수 있는 건 구마 의식을 직접 행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위한 물품과 장소, 그리고 현실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후회'가 얼마나 강렬한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진작 믿었다면, 아니, 적어도 무관심하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의 감정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후회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감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그 무력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게도 한다. 바오로 신부는 여전히 죄의식과 후회를 품은 사람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로 인해 유니아 수녀가 고립되지 않고 끝까지 악령에 맞설 수 있게 된다는 점은, 후회가 뒤늦은 도움일지언정 완전히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이야기 속 논쟁거리

정신병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논란거리다. 누군가는 의학적·과학적 치료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영적인 문제나 전통적 주술적 방식(무당, 굿 등)으로 접근한다.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은 구마 의식이라는 종교적 접근, 그리고 무당을 통한 민속적 접근, 의학적인 치료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각에 따라 대처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신적 문제나 질병을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런 복합적인 관점들을 끌어모았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물론 이야기 자체에 완벽하지 않은 구멍들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 방식만이 옳다고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트라우마나 초자연적 현상에 접근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영화 <검은 수녀들>은 제목만 보면 어두운 분위기의 공포·오컬트 장르로 느껴지지만, 정작 핵심은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한다.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그리고 바오로 신부의 후회를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상처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종종 우리는 절망, 죄책감, 후회 같은 감정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감정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래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될 수 있는지 담아낸다.

분명 영화상에서 아쉬운 구석이 없진 않다. 마치 급작스럽게 변하는 바오로 신부의 태도나, 미카엘라 수녀가 어떤 식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지 등의 설명이 부족하다. 다만,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뚜렷하다. '결국 인간을 흔드는 건 외부의 악령이 아니라, 우리가 내부에서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아닐까'이다.

전반적으로 큰 사건과 스펙터클에 집중하기보다는, 인물 간의 심리적 갈등과 변화를 다루는 데 공을 들인 영화이기에, 한 편의 심리 드라마를 본 듯하다. 오컬트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볼만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절망감을 이겨내고, 과거의 죄책감을 짊어진 채라도 한 발씩 나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일상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자, 내가 지닌 모든 감정의 집합체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자기만의 구원과 용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검은수녀들 검은사제들 오컬트 송혜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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