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원경> 관련 이미지.
tvN
권력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렬한 이방원은 이 상황을 보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위 실록에 따르면, 그는 "여성(驪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유독 내가 있다는 것만 알지 못하는 것인가?"라며 무관들을 질책했다. 그는 신하인 민무질의 이름을 자신과 병렬시키며, 민무질에 대한 무관들의 충성심을 탓했다.
뒤이어 이방원은 주모자를 체포해 국문하라고 지시했지만, 곧 철회했다. 그는 체포된 무관들을 모두 석방했다. 무관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신중 모드로 돌아섰다.
그런 뒤에 양위를 선언했다. 위 실록의 음력 18일 자 기록은 이방원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표명했음을 알려준다. 양위 선언이 민무질 때문에 나왔다는 직접적 기록은 없지만, 왕권과 직결되는 군사권 문제 때문에 임금과 민무질 진영이 충돌한 직후에 나왔으므로 두 사안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방원은 41세였다. 신하들은 군주가 젊고 세자가 어리다는 점을 들어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됐으니 바꿀 수 없다"고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계속 만류하자 "꼭 오늘 넘겨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서면서 "내가 다시 생각해 볼 테니 경들은 물러가라"고 청했다.
다음날이었다. 전날 양위를 선언했던 이방원은 19명에 관한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음력 19일자 <태종실록>에는 "여성군 민무질을 군권에서 해임했다"는 구절이 중간쯤에 들어 있다. 16일에 재가했다가 논란을 일으킨 민무질 해임 건을 이날 명확한 것이다.
이방원의 양위 선언은 8일 만인 10월 7일(음력 8.26) 철회됐다. 이방원의 왕권에는 변동이 없었고, 민무질의 군사권에만 변동이 있었다. 이 양위 파동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든, 그 와중에 민씨 가문의 군사권이 약해지고 이방원의 군부 장악력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칼이 아닌 말로 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양위 파동은 숙청과 정계 개편을 동반할 때가 많았다. 예전에 피를 많이 묻혔던 이방원은 왕이 된 뒤에는 양위 파동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피를 덜 묻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툭하면 칼을 빼 들었던 이방원도 임금이 된 뒤에는 쿠데타 방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sisahistory.com(오늘의주요뉴스 정리).제15회 임종국상.저서:제도밖의 권력, 영부인 리스크.아무도 몰랐던 독립운동 이야기,친일파의 굴욕,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문제인가,조선상고사,역사추리조선사,당쟁의한국사,왜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한국중국일본 그들의교과서가 가르치지않는역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