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이 된 구덕은 청수현 사람들을 도와 존경을 받는다.
JTBC
하지만, 경험은 늘 달라지고, 감정도 수시로 변한다. 무언가 계속 변하는 나를 일관된 나로 인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관찰하는 자기'가 존재한다. '관찰하는 자기'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변하지 않고 나를 인식하고 있는 자기를 말한다. 이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서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관찰하는 자기'의 존재를 자각하고 나면 변하지 않는 자기의 핵심에 닿을 수 있다.
일기 써본 기억을 떠올려보자. 일기 속에는 오늘 어떤 행동을 한 나 (경험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개념화된 자기)가 들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나'도 있다. 일기를 쓰면서 나의 모습을 관찰하는 '나'가 바로 '관찰하는 자기'이다.
노비 시절의 구덕과 태영으로서의 구덕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누더기를 입고, 툭하면 주인에게 매를 맞고, 굶주려야 했던 구덕은 태영으로 살면서 비단옷을 입고, '마님'소리를 들으며 몸종의 시중을 받는다. 하지만, 구덕은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살면서도 두 가지의 삶 모두가 '나'였음을 기억한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를 관찰하는 자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덕은 외지부로서 활동에 태영 아씨의 뜻뿐 아니라, 자신이 노비시절 겪었던 어려움을 비춰보며 '자기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 낸다. 11회 구덕은 "훌륭하다"는 승휘의 말에 "저는 힘들게 살아봤으니 저들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지요" 라고 답한다. 이는 외지부로서 청수현에서 했던 일들이 단지 '태영 아씨'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합해 해낸 일이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다시 <옥씨부인전> 첫 장면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누구인지 답하기 어렵다고 과연 구덕이 '가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개념화된 자기의 측면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다른 자기들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진실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구덕은 어떤 이름으로 불렸든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잊지 않고, 부당함을 겪는 사람들을 도우며,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다. 또한, 이 모든 것을 성찰하고 통합해 냈다. 그러므로 구덕의 삶은 그 자체로서 '진짜'였다.
우리 역시 그렇다. 지금의 내가 진짜 나로 살고 있는지 종종 의문이 들곤 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맡게 된 역할로서만 나를 인식할 때 갑갑하고 나답지 않다 느껴지기가 쉽다. 그럴 때 '개념화된 자기'에만 집중하지 말고 현재 내가 느끼는 것, '경험하는 자기'에도 주의를 기울여보자. 또한 이런 고민을 하고 스스로를 '관찰하는 나'도 느껴보자. 그럴 때 '규정된 나'를 넘어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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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