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빛살구> 스틸 이미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어두운 밤거리,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음산한 기운을 띤 젊은 여성이 서성거린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듯 주변을 돌아보던 그녀는 물색한 상대방과 만나게 되지만, 구애의 동작으로 보이던 건 실은 송곳니를 목덜미에 박아넣기 위해서다. 선연하게 피가 흩뿌려지는 것도 아닌데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라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기분일 테다.
이 모든 건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업무 중간에 뱀파이어 소재 웹툰을 작업하는 상황이다. 대기업 비정규 계약직 웹디자이너 '정서'는 남들 다 집에 간 뒤에도 포스터 작업 중에 살짝 딴짓하던 참이다. 뒤늦게 사무실에 출현한 부장은 능글거리며 정서의 정규직 전환 건을 언급하는 동시에 은근슬쩍 성희롱을 일삼는다. 웹툰 작업이 들통난 건 덤이다.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퇴근길에 그는 엄마 '미영'이 일하는 횟집에 들렀다 함께 귀가한다.
고단한 나날이지만 기쁜 일도 생긴다. 1000:1 경쟁률이라는 서울 금싸라기땅 신축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것이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 외쳐도 될 참이다. 다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다. 며칠 내로 계약금 납부를 탈 없이 마쳐야 청약이 확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 '경현'과 둘이 지금껏 모은 돈을 탈탈 털어도 모자라다. 정서는 엄마에게 은근슬쩍 자금 융통을 부탁하지만, 남의 가게 고용살이하는 엄마가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딸의 곤경에 마음이 쓰인 것인지, 엄마는 집 구석에 꽁꽁 감춰둔 물건을 꺼낸다.
숨겨둔 보물은 바로 엄마가 이혼할 때 정서의 아빠 '영주'에게 맡아둔 색소폰이다. 정서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색소폰을 응시하지만, 엄마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혼 당시에 재산 분할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몫 차용증이 색소폰에 붙어 있다는 것이다. 내용과 금액을 보니 얼추 아파트 계약금 모자란 금액에 맞아떨어지지만, 이미 재혼해 다른 가정을 꾸린 아빠를 보기 찜찜하다. 엄마가 처리해 주면 되지 않냐 물었으나 미영은 단호하다. 네가 쓸 돈이고 딸 부탁인데 아빠란 사람이 안 들어주겠냐며.
달리 뾰족한 수 없는 정서는 주말에 시간을 내 아빠를 찾아가야 한다. 아빠는 서울에서 한참 먼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서 뜬금없는 상호 '벌교' 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재회하게 된 옛 소꿉친구들,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는 동네 이웃들과 인사도 나누며 횟집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아빠의 재혼한 아내와 이복동생이 있다. 어색하지만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니 인사를 나누고 건들거리지만, 큰딸의 오랜만인 방문에 들뜬 아빠도 만난다. 과연 정서는 계약금을 받아내 인생역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
21세기 대한민국 가족의 단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