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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력 넘어섰다" 드라마 '지정생존자' PD 가 본 12.3 계엄

다시 열린 광장, 시민 하나하나가 '박대행'으로 은유된 지정생존자 아닐까

24.12.12 17:07최종업데이트24.12.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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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내란 사태'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여의도 국회에 투입된 무장 군인들.
'12.3내란 사태'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여의도 국회에 투입된 무장 군인들.연합뉴스/AFP

육군참모총장(이기영 분)은 계엄을 위해 준비됐던 계획대로 쿠데타 병력을 수방사에 집결시킨다. 이곳으로 합참의장(최재성 분)이 찾아온다. 반갑게 맞이하는 육참과 악수하는 대신, 합참은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반란군을 빠르게 진압한다. 합참이 그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지진희 분)과 계속 갈등을 빚어왔기에 육참은 합참의 이런 선택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쿠데타에 동참하지 않느냐는 육참의 질문에 합참은 답한다.

내 개인의 명예보다 중요한 건 우리 군의 명예니까. 자국민에게 총을 겨눈 우리 군의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를 내가 반복할 거라고 믿었나?- <60일, 지정생존자> 15회, 이관묵(최재성 분) 합참의장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2019년 07월 01일 ~ 2019년 08월 20일 방송, 16부작)의 연출자로서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청탁을 받았을 때 완곡히 거절하고자 했다. 5년 전 드라마를 이 시국에 빗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현재의 심각성을 저해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저 대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 장면을 찍는 동안 난 실제로는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시청자가 보기에 너무 거짓말 같을까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 역사가 반복됐다.

국회가 공격당한다는 건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력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7년 전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판권을 알아보고 기획을 시작했던 때의 생각이다. 그런데 드라마 상에서 국회가 폭탄 테러를 당하는 장면보다, 지난 주 국회를 우리 육군이 쳐들어가는 모습이 더욱 초현실적이었다. 드라마에선 해외 대테러작전에 투입됐던 707 특임단이 국회의 창문과 문짝을 부수고 있었다. 나의 현실 인식도, 상상력도, 지난 주의 계엄을, 내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국회의사당을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욕망은 정치혐오에 기반한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다 부패했고 민의를 반영하지 않으며 당리당략과 이기적 욕망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면 그런 국회를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폭파시켜 버리는 게 속이 시원하지. 실제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는 그런 정치 혐오에 기반해 스펙터클을 전시한 후, 원래는 평범했으나 곧 철인적 리더가 되는 후임 대통령을 묘사한다.

<지정생존자> 준비 당시의 기획 의도

 tvN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 포스터
tvN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 포스터tvN

그러나 <60일, 지정생존자>를 기획할 때 떠오른 생각은 달랐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헌법의 차이 때문에 대통령 유고시 지정생존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지 않는다.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대신 수행하고 60일 뒤에 새로 대선을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판은 철인적 리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행정부를 세울 때까지 본인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야 했다. 리메이크지만 캐릭터와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지정생존자>는, 시작은 솔깃한 정치 혐오적 발상이되, 결국에는 그 혐오를 뚫고 희망의 토대를 닦는 이야기가 되고자 했다. 정치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테러로부터, 정치를 가장 긍정하는 투표와 선거에 이르는 여정이 <60일, 지정생존자>의 주 골자였다.

제작 준비를 위해선 헌법을 공부해야 했다. 책을 샀고 자문을 받았다. 한 나라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연출자로서 '드라마적 허용'조차도 현실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늘 두려웠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우리 팀만의 망신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 대한 결례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님은 플롯을 상상하고 구성할 때마다 헌법을 포함해 많은 자문을 구해야 했다. 고된 작업이었다. 그만큼 한국을 움직이는 시스템과 논리는 복잡하고 정교했다. 이야기를 함부로 뻗어 나가게만 할 수가 없었다. 현실의 대한민국을 존중해야 했다.

드라마 1회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사당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다가 테러로 여당 국회의원들과 함께 폭사당한다. 드라마는 그 범인과 범행의 이유를 쫓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청자의 추리가 이어졌다. 어떤 시청자들은 이렇게 추리했다.

'대통령의 자작극 아냐? 드라마 속 대통령이 지지율도 낮고 정치 세력도 약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렇게 셀프 쿠데타를 하고 숨어 있는 것 아냐?'

나는 무척 창의적인 시청자라고 생각했다. 우리 이야기의 방향은 애초에 그렇게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대통령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를 저지른다는 것은 정치 드라마로서의 <지정생존자>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은 현실에서 일어났다.

드라마 1회를 완성하고 내부 시사를 했다. 스튜디오로부터 장르물적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일종의 현실적 재난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국회의사당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 어디가 어떻게 폭파될 것인지, 그로 인해 어떤 직위의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죽을 것인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다 상상하고 계획해야 했다. 이것은 너무 생생한 재난이었다.

한국 사회는 갑작스럽고 원통한 재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이야기 아래에는 깊은 슬픔과 애도가 깔려 있음을 만들어가면서 더더욱 절감했다. 테러 주동자, 혹은 테러 분쇄자의 입장에서 신나게 달리는 종류의 이야기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여야 했다.

계엄 뉴스를 처음 들은 순간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박무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진희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박무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진희tvN

계엄 뉴스를 처음 들은 순간은 앞으로도 잊기 힘들 것이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지 못하듯이. 뉴스를 읽으며 나는 입으로 한음절 씩 조용히 발음해 보았다. 계, 엄. 그 계엄. 80년 광주의, 48년 제주의,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계엄. 왜? 무엇 때문에?

서사를 구축할 때 악역의 매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갈등이 이야기를 끌어나가므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매력적이고 이유가 신선할 때 이야기가 힘을 받는다.

반면 주인공은 강직하다. <60일, 지정생존자>는 특히 그래야 했다. 주인공이 복잡하지 않고 선량하니, 이야기를 끌어가려면 갈등을 매력적으로 제시할 악역이 필요했다. 그래서 테러의 배후 인물 중 하나이자 차기 대통령 주자로 묘사된 오영석(이준혁 분) 캐릭터에 많은 설정이 들어갔다. 해군 출신이며, 젊고 수려한 미남에, 국가가 군인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원한을 품고 있고, 권력의지가 강하며, 미술에 취미가 있고, 해전 당시의 상처가 몸에 남아있고, 지역을 초월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등등. 시청자들이 미워하려다가도 헛갈리게끔. 좋아하다가도 멈칫 하게끔.

우리는 늘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궁금해 하니까, 참신한 답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악의 참신성에 골몰하게 된다. 아니면 평범한 악을 참신하게라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건 이야기의 논리다.

현실에서의 악은 그렇지 않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에 대해 '악의 진부함'을 이야기한다. 인류사적 비극에 대해 우린 어떤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어 뭔가 색다른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대개 그렇지 못하다. 지독한 비극의 이유는 지독하리만치 진부하다. 그저 명령에 따랐다거나,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거나.

계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독하게 진부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시대와 맥락을 벗어난 나머지 진부함이 오히려 신선한 지경이었다. 내 상상을 뛰어넘었지만 참신해서가 아니었다. 내 상상에서 폐기된 진부함이었다. 그 진부함은 어떤 괴멸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참신함으로 그 결과를 막아낼 수 있을까.

난 <60일, 지정생존자>가 한국 현대 정치사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랐다. 드라마 내적 이유에 의해 제목과는 달리 30일의 여정을 다루는 이야기이지만, 그 30일 안에 한국 현대 정치사의 면면을 대입해볼만한 우화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박무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진희와 경호부장 강대한 역할을 맡았던 배우 공정환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박무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진희와 경호부장 강대한 역할을 맡았던 배우 공정환tvN

쿠데타의 등장도, 계엄지도도, 테러도, 권한대행의 행정부도 그런 이유에서 촘촘히 구성됐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 동안 <60일, 지정생존자>는 우화도 은유도 아닌 그저 성긴 직유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친위 쿠데타의 진부함이 새롭고자 했던 드라마의 노력도 부질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내 마음 속에 계속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권력과 민중의 본질
에 대해 냉소적으로 일갈하는 오영석(이준혁 분)에게 되묻는 박무진(지진희 분)의 말.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리고, 차영진(손석구 분)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권한대행을 퇴임하는 박무진의 연설을 위해 만들어낸 문구.

'마침내 우리의 자부심, 대한민국'

정말로 이런 모든 문제들을 정치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차영진에 대해 박무진이 하는 대답.

정치는 신이 부여한 모든 고통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대답이니까요.

문득 다시 깨닫는다. <60일, 지정생존자>의 주인공은 모든 시민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것을. 박무진 권한대행은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시민이 갑자기 행정부의 수반이 되었을 때 겪는 고뇌와 선택의 시간을 다른 시민들에게 대리 체험하게 하기 위한 매개였음을. 박무진은 한주승(허준호 분) 정책실장에게 묻는다.

누군가는 테러를 저지르고, 또 누군가는 그 테러를 막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존재일까요. 같은 나라이긴 한 걸까요? 한실장님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에 한주승은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현재의 권한대행인 박무진에게 있는 것 같다며 되묻는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박대행?

수많은 냉소를 뚫고 다시 시민의 광장이 열렸다. 지금은 시민 하나하나가 박대행으로 은유된 지정생존자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시끄러운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서로 묻고 답하기 위해. 시민 모두가 대한민국의 지정생존자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우리의 모색이야말로 참신한 이야기의 재구성을 가져올 것임을 믿는다.
지정생존자 윤석열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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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출합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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