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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 전세금 빼 제작사 차린 '1승' 감독 "영화산업, 지금이 더 위기"

[인터뷰] 영화 < 1승 > 신연식 감독

24.12.04 15:08최종업데이트24.12.0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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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로 '빛과 소리'라는 뜻의 루스이소니도스 대표,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감독까지. 한국영화계에서 신연식이라는 이름 뒤에 붙는 호칭들이다. 영화 비전공자임에도 독립예술영화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전방위적으로 활동해 온 그가 최근엔 OTT 플랫폼(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삼식이 삼촌>)과 대중영화로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다. 4일 개봉하는 영화 < 1승 >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배구 이야기다. 스스로 운동에 소질이 전혀 없고, 승부욕조차 없다는 그가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서울 삼청동에서 4일 오전 만난 신연식 감독은 "10년도 더 된 기획"이라고 운을 뗐다.

온 우주가 돕는 기적들

 영화 <1승>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
영화 <1승>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키다리스튜디오, 아티스트유나이티

영화 <1승>은 나름 촉망받던 학생 선수가 감독을 잘못 만나 빛을 보지 못한 채 은퇴한 후 괴짜 구단주를 만나 프로팀 감독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해체 직전이던 핑크 스톰은 말대로 오합지졸이다. 20년 경력이지만 이렇다 할 활약은 없이 지낸 노장부터, 분노를 삭이지 못해 매번 구설수에 오르는 선수, 만년 후보 선수 등. 이들을 마주한 김우진 감독(송강호)도 인격적으로 보면 그리 성숙하지 못하다. 단 1승만 해달라는 구단주 부탁에 선수 및 감독이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이 재치 있게 담겼다.

"딸이 태어나고 아이와 함께 보고 싶어서 기획했는데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딸은 중학생이 되었고. 시나리오를 수정할 때마다 딸아이에게 보여줬는데 한 50번 정도 수정했던 것 같다. 다행인 건 수정 작업이 힘들진 않았다. 사람이 죽거나 힘든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밝은 이야기에 배구라는 스포츠를 다루고 싶었다. 사실 제가 운동 경기 보는 건 좋아하지만 운동 신경은 심각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스포츠가 좋은 건 그 안에 인간의 특징 중 하나인 인정 욕구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배구는 실내 스포츠면서 박진감을 구현하기 가장 좋은 종목이라 생각했다. 탁구나 배드민턴은 스피드는 있지만 코트(court)가 너무 작고, 농구는 신체 조건들이 절대적으로 부딪히는 운동인 반면, 배구는 서로의 공간에서 공을 주고받으며 빠른 속도로 경기하는 거라 영화적으로 구현하기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신연식 감독은 인간과 동물이 다른 이유 중 하나로 인정 욕구를 꼽았다. 생존본능에 따라 먹고 먹히는 동물들과 달리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인간들만 가지고 있다는 지론이다. 신 감독은 "그것 때문에 동물보다 훨씬 더 추악해지기도 하고,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숭고한 면이 드러나기도 한다"며 "그게 잘 나타나는 게 스포츠"라고 말했다.

"동물의 세계에선 먹고 먹히면 끝인데 인간의 스포츠엔 룰이 있다. 그 규칙을 치열하게 지키면서 인정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괴상하고 희한하다. 법과 제도와는 다른데, 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해관계를 억제하는 거잖나. 스포츠 규칙은 임의대로 정한 것이거든. 규격, 규칙을 어기지 않는지 심지어 비디오로 판독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숭고함이 나타나기도 하는 셈이다."

 영화 <1승>의 한 장면.
영화 <1승>의 한 장면.㈜루스이소니도스

신연식 감독이 연출하거나 제작해 온 작품과 달리 스포츠 영화로써 < 1승 >은 감독이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정확한 자세와 각도를 위해 현장에 배구인 코치들이 상주했고, 감독과 함께 모니터를 확인하며 촬영을 함께 해나갔다고 한다. 배우 송강호, 박정민, 장윤주, 박명훈 외에 선수 역할은 실제 선수 출신이거나 모델, 혹은 운동 신경이 좋은 배우들로 꾸렸어야 했다. 일종의 배구를 위한 외인구단이 탄생한 격이다. 그간 자신의 작품에서 신인 배우를 대거 기용했던 맥락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이민지 배우는 워낙 신경이 좋아서 CG를 거의 안쓰고 실제로 경기했을 정도다. 현장 코치님들도 프로구단에서 테스트 제안을 할 정도의 수준이라더라. 배구라는 게 워낙 어려운 종목이더라. 배우에게 배구를 가르치는 게 빠를지 선수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게 빠를지 잘 몰랐는데 후자가 훨씬 빠르더라. 신체적으로 175cm의 신장이 넘어야 하는데 여성 배우만으로 그런 조합을 짜는 게 쉽지 않기도 했다."

영화 속 선수들 이름을 보라, 수지, 하니 등으로 설정한 것도 낯선 얼굴을 관객들에게 보다 쉽게 각인시키기 위한 이유였다. 신연식 감독은 "주연 배우야 알려진 얼굴이지만 경기 장면에 등장하는 선수들만 최소 16명인데, 직관적으로 친근감을 주기 위해 아이돌 가수 멤버들 이름을 썼다"고 설명했다.

"송강호의 한 마디, 놓치지 않았다"

 영화 <1승> 스틸
영화 <1승> 스틸㈜아티스트유나이티드

영화에서 배구 경기만큼 중요했던 게 김우진이라는 인물이다. 산전수전 겪은 중년 남성으로 등장하지만 감독의 처음 시나리오엔 청년 버전, 여성 감독 버전 등 몇 차례의 수정이 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감독은 일상의 작은 승리, 작은 기적을 통해 각자의 삶을 환기해보길 바라는 메시지를 김우진이라는 인물에 담고 싶어 했다.

"우리가 일상처럼 지나가는 누군가의 승리나 패배는 순간이지만, 우주와도 같다. 기자분들도 마감이 그렇잖나. 영화라는 것도 2시간이 훅 지나면 끝나는데 그 와중에 망하는 영화가 있고 흥하는 영화가 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누군가의 운명이 바뀌거든. 김우진 감독도 본인만의 철학과 배구관이 있는데 삶이 꼬이면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나.

어떤 독립영화 감독이 치열하게 작업했는데 우연히 한 심사위원의 반대로 상을 못 받아 인생이 꼬일 수도 있다. 나도 그런 흐름에 순응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었다. 제가 지금껏 이 사람이 상업영화 감독했으면 크게 성공할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만 해도 스무 명도 더 된다. 그만큼 한끗 차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주목받게 하고 키워내려면 그만큼 대우주가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결과만 보지 말고 그 과정들 자체가 우주와도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사실 < 1승 >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신 감독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준비하려던 사극 영화가 엎어졌고, <거미집> <삼식이 삼촌> 제작도 지지부진하던 때 배우 송강호를 만났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보고 투자자들은 결정을 한 상황에 배우 캐스팅이 문제였다"며 신연식 감독은 "그때는 젊은 감독으로 설정했는데 경기에서 뛰는 선수들과 뭔가 장벽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사석에서 송강호 선배님이 연배 있는 배우가 감독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삶의 우여곡절이 있는 김우진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 신 감독은 "선배님은 흘려 말하셨겠지만 전 그걸 놓치지 않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학교 중퇴 후 1995년 연출부 일을 시작한 이후 신연식 감독은 내리 준비하던 10여 편의 영화가 모두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사비 40만원을 털어 만든 <피아노 레슨>(2003), 300만원을 들여 만든 두 번째 장편 <좋은 배우>(2005)가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영화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배우 안성기가 출연하기로 한 <페어 러브>(2010)가 엎어질 위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신혼집 전세금을 빼 직접 지금의 제작사를 차려 영화를 완성해낸 건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은 그때 보다도 지금이 훨씬 더 영화산업이 위기라고 생각한다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영화산업은 언제나 부침이 있었다. 예전엔 단순히 시장 상황이나 시스템이 좋지 않았다면, 지금은 진정한 21세기로 접어면서 발생한 침체기랄까. <동주> 각본을 쓸 때 제가 진정한 20세기는 1901년이 아닌 1920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세기 기득권의 힘이 빠지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과거 기득권이 완전히 저물기까지 20년의 시차가 있다는 뜻이다. 2001년이 물리적인 21세기 시작이라지만, 여전히 20세기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왔잖나.

그게 통하지 않게 된 게 정확하게 코로나19 팬데믹 때인 2021년, 2022년인 것 같다. 새로운 변혁기를 맞이한 마당이라 전혀 다른 어려움이 영화산업에 생긴 것이지. 소비 패턴도, 매체 환경도 달라졌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 이후 서사의 작동 방식은 지금까지는 바뀌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TV, 그리고 유튜브로 매체만 바뀌는 것뿐이지. 근데 21세기에 그 근간마저 흔들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함부로 예견 못 하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20세긴 끝났다는 사실이다. 예전이 좋았다며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이제 유효한 말이 아니다."

새로운 실험과 도전들

 영화 <1승>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
영화 <1승>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키다리스튜디오, 아티스트유나이티

그렇기에 신연식 감독이 해왔던 독립예술영화 실험, 즉 본인이 장외시장 생태계로 말했던 저예산 영화 실험 또한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었다. 순제작비 10억 원 미만 프로젝트였던 <러시안 소설>(2013), <배우는 배우다>(2013) <조류인간>(2015) 등을 들며 그 실험의 결과를 물었다.

"절반은 유효하고 절반은 아닌 것 같다. 40세가 되기까지 단순하게 말하면 코스닥과 나스닥 말고 장외시장처럼 상업영화 외에 또다른 시장이 가능할 것 같았다. 주류 영화와는 다르면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시장이 생길 수 있다 기대했는데 극장 환경의 변화를 제가 간과했더라. 지금에야 드라마도 하고, OTT 작품도 하고 있는데 이젠 플랫폼 환경 변화까지 고려해야 한다.

예전처럼 저예산으로만 하는 장외실험은 안 할 것 같고, 주류 시스템 안에서 건강하고 다양한 걸 할 수 있는 아이템과 방식을 고민할 것 같다. 전처럼 예산에만 맞춰 장외에서 하는 게 무의미해진 것 같다. 그 예시가 유튜브다. 톱스타 유튜버보다 덜 알려진 유튜버가 훨씬 더 잘 되기도 하잖나. 이미 그런 시대가 왔다."

물론 절대다수를 위한 상업적 작품이 신연식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성만은 아니었다. "< 1승 >이 많은 대중과 가급적 공감하기 위해 만든 것이긴 하지만 매 작품을 흥행만 목적으로 했던 게 아니다"라며 그는 "< 1승 >을 포함해서 제 작품은 개인의 삶에서 우린 각자 어떤 존재인가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담겼다"고 말했다.

"수치상 성공 실패는 있겠지만 흥행보다는 영화 속 김우진처럼 저의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작품이 흥하든 망하든 말이다. 김우진도 선수들 앞에선 팀을 버리고 대학팀에 가네 마네 하지만, 속마음은 그들을 데리고 이기고 싶어 하잖나. 그게 안되니까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도 그렇다. 내가 뭐라고 영화산업구조를 고민하고, 말 같지 않은 생각을 하나 싶다가도 영화를 왜 내가 하고 있는지를 떠올리곤 한다. 최근에 프로게이머 페이커 선수 인터뷰를 봤는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공에 포함된 거라더라.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저도 작품을 하는 이유를 잃지 않는 게 제 진짜 목표다."
신연식 1승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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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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