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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주 앞두고 본 '계약결혼'의 전말... 잘살 수 있을까

[리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

24.12.09 13:37최종업데이트24.12.0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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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짜 결혼 생활을 하다가 진짜 사랑에 빠진다는 뻔하고 흔한 줄거리를 알면서도, 토요일 새벽 혼자 서늘한 거실에 앉아 '다음 화' 버튼을 연거푸 누르며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를 봤다. <트렁크>는 1년짜리 기간제 계약 결혼으로 맺어진 두 남녀가 서로를 가만히 위로하고, 결국에는 구원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주연인 서현진과 공유의 연기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지독한 거짓말과 가스라이팅을 펼치며 어두운 욕망과 본성을 서서히 드러내는 '전 아내' 역의 의 연기는 새벽잠 내내 나를 악몽에 시달리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정상 가족 향한 질문

 가짜 결혼 생활이 점점 진짜처럼 변해갈 수록 두 인물 모두 혼란스럽다.
가짜 결혼 생활이 점점 진짜처럼 변해갈 수록 두 인물 모두 혼란스럽다.넷플릭스

결혼식을 2주 정도 남기고 있어서 그런지, 신혼집을 꾸민 지 이제 2달이 막 넘어가서 그런지,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러 인물을 보면서 결혼이란 어떤 건지, 특히 '정상 가족'이란 뭘까 하는 의문이 며칠째 나를 따라다닌다.

30년 넘게 다른 삶을 살아오던 두 사람이 어느 날부터 한집에 살게 된다. <트렁크>의 집처럼 너무 넓고 커서 되려 외로운 대저택이 아니라, 침대만 놓아도 한 방이 꽉 차는 크기의 조그만 공간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입맛과 취향, 습관, 청결에 대한 개념 등을 알아가고 협의해 간다. 쉬는 데 필요한 휴식의 형태나 잠의 양도 다른 두 사람이 긴 시간 함께하다 보면 결국 사회화 아래 감춰뒀던 욕망과 감정의 밑바닥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자꾸 드는 의문, 결혼이란 과연 합리적인 제도일까.

처음에 <트렁크> 속 기간제 부부들을 보면서 결혼 생활에서 각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가 아침을 차려주고 또 건조기로 이불을 말린다. 미리 탐색할 기회도 없이 한 공동체로 묶인 타인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 앞에서 평범한 부부의 역할을 수행한다. 낮에는 뭘 했는지,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밤에는 한 이불 아래서 잠이 든다.

재산이 많은 드라마 속의 두 부부에겐 돈과 관련한 설정이 생략돼 있지만 우리는 안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하루하루 버티는 노동과 삶의 무게 속에서 부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또 다른 부담이 되는, 평범하고 쉽지 않은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백년해로라는 환상은 현대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쉽게 거부할 수 없다. 서현진이 애초에 결혼하려고 했던 남자는 그의 정체성 때문에 사회에서 비난받고 거부당한다.

'정상 가족'을 강요하는 사회의 틀 안에서 서현진의 욕망은 되레 사랑하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앞에 나타난 거대 기업의 기간제 결혼이라는 계약은 얼핏 꽤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부 부자들에게만 적용 가능한 비현실적인 해결책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부부는 공유의 지인으로 나오눈, 아들 둘을 낳고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여자와 그 앞에서 아들들이 너무 빨리 큰다며 울음을 터트리는 남자다. 아이 둘을 돌보는 데 드는 비용이 여자가 자아를 되찾는 비용보다 비싼 이 사회의 이야기는 너무도 평범하고 또 흔해서 누구도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게 현실이다.

진짜와 가짜

 서명하는 순간, 1년 짜리 결혼 계약이 성사된다.
서명하는 순간, 1년 짜리 결혼 계약이 성사된다.넷플릭스

<트렁크>는 계속해서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결혼이라는 제도, 그 사회 속에서 부서지고 무너지는 개인들, 그 각자의 어두운 욕망과 욕심 속에서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외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간절히 원하는데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하는가. 머릿속으로는 누구나 아는 평화로운 정답을 쉽게 실천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친구 같은 연인과 헤어질 걱정 없이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마침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 가족' 범위 내에 속하는 것어서, 나의 결혼은 주변 친인척들에게 격렬하게 축하받고 도움받는 중이다. 처음엔 감사하고 또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현재 연인과 꾸리기 시작한 삶 자체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얼떨떨한 마음 자체는 한 편에 밀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트렁크>를 보면서 저들보다 더 각박한 우리의 현실과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다.

'정상 가족' 운운하며 최근 결혼과 관련한 심경을 이야기했더니 정신의학과 선생님이 여성학 책을 본인의 현실과 연결해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페미니즘을 지적 유희로 생각하는 사회의 주류층 앞에서 나는 가만히 입을 닫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마흔이 다 되어 가도록 결혼도 못한 기 센 여자' 취급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드디어 결혼에 성공해 축하받는 새 신부'가 된 입장에서 글쎄,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나도 쉽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트렁크>는 마지막 한 회를 남겨두고 있다. 구원 서사의 마무리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은 서현진이 공유에게 제공한 것, 또 공유가 서현진에게 보여준 것들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온전한 존재로 행복할 수 있게 하는 진짜 사랑이, 절실히 갖고 싶은 나머지를 파괴해 버리는 가짜 욕망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고 싶다. 그 고민이 나와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트렁크 넷플릭스 공유 서현진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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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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