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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방법을 몰라" 서울대 나온 수재에게 찾아온 고민

즐길 여유가 없는 한국사회... 14년 전 루시드폴과의 인터뷰를 떠올린 까닭

24.11.30 11:40최종업데이트24.11.3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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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안테나

2010년에 가수 루시드폴(본명 조윤석)을 인터뷰했던 적이 있습니다. 취업과 스펙쌓기가 아닌 꿈을 향해 도전하는 2030세대의 사연을 찾아다니던 중 그를 만났습니다.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93학번)를 졸업하고,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루시드폴은 안정적인 공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에 전념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시기(93학번) 공학 계열 전공자였지만, 사회과학 책을 쓰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보니 왠지 모를 동료 의식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대화는 제게 많은 울림을 줬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14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고 느껴 최근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는데,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공감되는 내용이었나 봅니다. 300명이 넘는 분들이 글을 공유했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앞으로 나아지겠지 기대했는데, 달라지기는커녕 더 각박해져서 그런 게 아닐까요. 꿈과 여유를 즐길 틈조차 없는 요즘 시대에, 원하는 일과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루시드폴의 말들이 귀하게 다가와서 아닐까요.

오늘도 무료하게 웹서핑을 하며 기사들을 읽어내려갈 누군가에게 위로와 동기가 될까 싶어 그날의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다시 나눠봅니다.

[관련 기사] '워커홀릭' 공학자가 왜 가수가 됐을까 http://bit.ly/cFnnT4

잘 논다는 건 무엇일까

루시드폴은 공학도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인재였습니다. 스위스 화학회가 주는 최우수 논문 발표상도 받았고, 그가 논문을 통해 발표한 의료용물질은 미국 약품 특허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공학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5년에 걸쳐 쌓아온 커리어를 한꺼번에 포기하고 음악에 전념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 무모하게 보이는 경로 변경에 나선 걸까요.

그는 스위스에서 박사 논문이 통과되고 휴가를 냈던 일주일의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친구 집에서 쉬었다는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즐겨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열심히 해야 한다,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은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잘 놀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노는 방법도, 논다는 것이 뭔지도 아리송했습니다. 그에게 아무도 얘기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술 마시고 퍼져 있는 게 노는 건가? 여행 가는 게 노는 건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혼란에 그는 "그동안 시간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루시드폴 편 방송화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루시드폴 편 방송화면tvN

사실 루시드폴은 열심히 사는 한국인의 전형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워커홀릭(Workaholic)으로 불릴 만큼 연구에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주말도 공휴일도 없었습니다. 이란에서 온 동료가 주말마다 그를 불러내서 어떻게든 같이 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혹시나 루시드폴이 쉬지 않고 연구하다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그랬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열정은 결국 몸과 마음의 과부하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년 정도 그렇게 사니까 이상이 오더라고요. 어깨가 너무 무겁고 결리더군요. 몸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게 결국은 긴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야지, 빨리 졸업을 해야지, 어려운 프로젝트를 보란 듯이 성공시켜야지, 이런 것들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인생의 여정에서 핸들의 방향을 과감히 틉니다. 그동안 하던 공부를 접고 음악을 계속 하기로요.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제 자체가 가벼워서 쉬웠다는 것은 아니고 답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음악을 해왔지만 생업이 필요해 연구생활과 병행해왔습니다.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고치는 약을 만드는 일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왔기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민의 시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고민의 가장 큰 부분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병역특례로 1999년부터 산업기능요원으로 3년 반을 일할 때도, 유럽에서 연구하며 공부할 때도 계속 월급을 받았습니다. 매달 급여를 받으며 10년을 지냈는데, 음악을 하면 이젠 통장에 달마다 꽂히는 돈 없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뮤지션 루시드폴의 인생을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일거리가 없으면 백수, 일이 있으면 프리랜서인 삶에 접어들었습니다. 그의 통장 잔고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워커홀릭으로 지낼 땐 몰랐던 '노는 것'에 대한 정의도 자기만의 답을 찾은 듯했습니다.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삼일 동안은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으면서 만화책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쉬는 것에도 엄숙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멋있게 쉬어야 하고, 쉬면서도 교양서적을 봐야하고, 그런 것들 말이죠.

저는 막 놀았어요. 못 만났던 친구 만나 술 마시고, 강아지 키우고, 산책도 다니고요.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물론 음반 낼 때가 되면 열심히 일을 했죠. 내가 원하던 일이고 가야 하는 길이니까요. 즐겁게 했습니다."

술 마실 돈은 있지만 시디를 살 여유는 없는 이유

 2016년 11월 26일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루시드폴
2016년 11월 26일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루시드폴KBS

아이돌이나 K팝 스타들은 다양한 수익사업으로 돈을 벌 수 있지만, 정말 '음악'만 하는 뮤지션이나 인디 밴드들에게 음반시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정한 루시드폴에게는 이것이 자신이 맞서야 할 현실이었고, 2024년인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14년 전 인터뷰 당시 나름 대비책이 있나 싶어 물어봤는데, 돌연 그는 '먹고사는'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사는 게 힘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음반시장 상황이 나아지기는 어렵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아이 하나 떳떳하게 교육시키기 힘들고, 내 집 한 채 장만하기도 어렵고, 회사는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는데 "여유 있게 차 한잔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러갈 정신적 여유"가 어디 있겠냐는 물음입니다.

"단순히 돈 1만 원, 2만 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친구랑 술 한잔 하면서 몇 만 원 쓸 수 있지만 음악 시디(CD)를 살 여유는 없는 거죠.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거예요. 지금 음악을 많이 듣는 10대라도 나중에 30대, 40대, 50대가 되면 음악을 안 들을 겁니다. 야근이 당연한 것이고,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서 시디 사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옛날에 음악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저보다 음악도 더 많이 듣고, 음악 하겠다고 얘기하던, 그런 친구랑 어제 술을 먹었는데요. 그 친구가 '음반시장은 앞으로 30·40대 연령대에서 팽창할 거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기에 제가 얘기했어요. 너 지금 음악 안 듣지 않느냐고, 너 최근 2년 안에 시디 산 거 있냐고, 멜론에서 MP3 산 적 있냐고 말이죠. 그 친구도 남 보기에는 근사한 직장을 다니지만, 하루에 4-5시간밖에 못자고 밤 12-1시까지 일하는 것이 예사예요."

저와 인터뷰할 때 루시드폴은 '음악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성도로 만들어 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들어주든 그렇지 않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계속 공학자의 삶을 이어갔다면 안정적인 삶과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통장이 보장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학을 통해서는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음악가의 삶은 그에게 안정적인 삶과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통장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조윤석, 아니 루시드폴은 음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12월 홈쇼핑 방송에 출연해 정규 7집 쇼케이스를 연 루시드폴. 음반과 함께 자신이 직접 키운 귤 등을 묶어 한정판 패키지로 팔았다.
2015년 12월 홈쇼핑 방송에 출연해 정규 7집 쇼케이스를 연 루시드폴. 음반과 함께 자신이 직접 키운 귤 등을 묶어 한정판 패키지로 팔았다.CJ온스타일

지금도 그는 성실히 앨범을 내오고 있습니다. 음악 말고도 다른 일들도 합니다. 2014년엔 제주로 이주해 감귤 등을 재배하며 농부가 됐고, 글을 쓰고 번역하는 작가로도 활동 중입니다. 다시 시작된 병행이지만 예전의 워커홀릭이던 그와는 조금 다를 거라 짐작합니다. 자유롭게, 자기답게 일하고 놀고 즐기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루시드폴 조윤석 임승수 인생관 어떻게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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