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이가 말했다. 홍상수 영화가 싫다고.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가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것 같다며, 내용이며 배우의 대사 하나하나까지 홍상수 본인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말이다. 제게는 그것이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운 이유라는데, 영화 속 이야기가 순수한 의도로 창작된 결과물이 아니란 사실이 그를 적잖이 불편하게 하는 듯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와 같은 이들이 적지는 않은 듯하다. 언젠가부터, 정확히 짚자면 홍상수와 김민희의 스캔들이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뒤로부터 그의 영화에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가 많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영화평론가로서 그의 작품을 세세히 뜯어보자면 과연 그의 영화세계에도 변화라 할 만한 것이 없지가 않다. 그 변화의 지점에 대해 누군가는 자기변명이라 비판을 내어놓는 것이겠다.
흥미로운 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어느덧 홍상수와 그의 영화를 응원하게 된 나도 그중 하나다.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추앙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던 그 시절 홍상수 영화에 대해 '술자리에서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사내들, 그마저도 지질하고 못난이들의 경박하고 민망한 대립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것뿐 아니냐'고 이야기하곤 했다. 볼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많은 작품이 자기복제를 거듭하고 초기작이 거둔 성취 이상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단 사실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팬보다는 안티에 가까운 이였다.
세상 또한 감독을 만든다
지금은 다르다. 홍상수가 한국에 따로 짝을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작가라 여긴다. 명색이 언론이란 이들이 사인의 사생활을 저잣거리 영희와 철수에게 낱낱이 알리는 것이 저널리즘인 양 굴었고, 그로부터 제 가정사며 연애가 온갖 이들이 물고 뜯고 씹고 즐기는 무엇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일이다. 그 가운데 억울함이,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놀라운 건 홍상수의 영화가 그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단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자기변명이 아니냐 비판할 만큼,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작품과 삶의 유의미한 연관성이 색다른 감상을 일으켰다.
그저 자기변명이라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분히 자기 자신, 자신이 대면해온 세상을 투영해 빚어낸 캐릭터와 사건들은 작가 홍상수에게 지난 시간들이 무엇을 남겼는지를 알도록 한다. 그저 골방에 틀어 앉아 생각하는 것만으론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이 각 영화의 주제가 되니, 삶과 예술가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독 홀로 영화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 또한 감독을 빚어낸다.
홍상수는 바지런한 창작자다. 매년 두어 편씩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온 그가 올 가을 내놓은 신작이 바로 <수유천>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어느 여대 한 학과의 촌극 연출지도를 위해 멀리 강원도에서 온 60대 사내(권해효 분)다. 그는 이 학교 강사로 일하는 전임(김민희 분)의 외삼촌으로, 20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조카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외삼촌이 조카를 도와 학교의 오랜 전통인 촌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는다.
대학교 촌극 공연, 그로부터 빚어진 일
홍상수 영화가 대개 그렇듯, 영화는 인물들 간의 만남을 가까이서 보여준다. 학교엔 전임을 챙겨주는 정 교수(조윤희 분)가 있는데, 그녀는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로 경력을 쌓아온 외삼촌의 오랜,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찐팬'이다. 자기 최애가 전임의 요청으로 자신이 속한 학과에 와 연극연출을 하게 됐으니 이 기회를 어떻게 흘려보내겠는가. 어쩌면 오래 연을 끊고 살다시피 하던 전임이 제 외삼촌에게 연락한 것도 그녀의 입김이 들어간 영향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전임과 외삼촌, 정 교수는 몇 차례에 걸쳐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로부터 자연스레 드러나는 정보는 이번 영화가 어느 지점에 골몰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언제나처럼 <수유천>에서도 카메라 밖 홍상수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외삼촌은 지난 몇 년 간 어떤 사건에 휘말려 곤혹을 치른 모양으로, 정 교수는 첫 만남부터 그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깊이 공감하고 함께 분노한다.
저를 진실로 알아주는 이에게 호감을 품게 되는 건 인간사의 법칙이라 해도 좋지 않은가. 그러나 외삼촌과 정 교수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전임이 어딘지 불편해 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왜일까.
영화는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 한 편으로 외삼촌이 지도하는 촌극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전임에 따르면 본래 촌극엔 연출자와 일곱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어떠한 이유로 학생 세 명이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전임이 가십처럼 전하는 이야기는 남성인 연출자가 학생 가운데 세 명을 따로 불러 만났고, 그로부터 촌극이 깨지게 됐단 내용이다. 결국 못쓰게 된 본래 연극 대신에 급한 대로 연극계에서 이름난 외삼촌에게 SOS를 치게 됐단 것. 열흘이란 촉박한 시간, 어딘지 비협조적인 학생들을 독려해 외삼촌은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흥미로운 건 다음이다. 어느 날 수업 뒤 부적절하게 퇴출됐다던 연출자(하성국 분)가 전임을 만나러 온 것이다. 전임과 그의 미묘한 대화를 카메라는 날 것 그대로 담아낸다. 전임은 그가 약속도 잡지 않고 온 것이, 아마 잡았다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겠으나, 몹시 불만이다. 그가 이 학교에 다시 발을 디딘 게, 또 제 앞에 나타난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비협조적으로 대한다. 몇 달 간 끌고 온 작품을 완성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은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느냐'는 연출자의 호소 앞에 전임은 그가 무엇을 엄청나게 잘못했다는 듯이 대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 것이 죄냐는 이와 그건 있어선 안 되는 부적절한 일이었단 이가 정면으로 맞붙는다.
흥미로운 건 관객이 그들 사이 있었던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단 거다. 아는 거라곤 앞서 전임이 제 외삼촌에게 그가 오기까지의 경위를 간략히 설명한 것, 또 자기 또한 대략적인 정황을 학생들로부터 귀띔해 들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관객은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맞서는 상황 아래 잠겨든 진실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건 당사자만 아는 것이니까. 연출자와 그가 접촉해 제 마음을 고백했던 이들 말이다.
얼마 뒤 상황은 한 걸음 나아간다. 학생들이 전임을 찾아 한 친구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다 큰 성인이 30분 쯤 연락되지 않는 게 무어 큰 일이겠느냐만, 그 연출자가 불러낸 뒤 연락이 끊겠단 얘기에 전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그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한 연출자는 학생과 어느 나무 아래서 대화하고 있다. 연출자는 외삼촌과 함께 자리를 비켜나고, 남은 학생이 전임과 다른 이들로부터 추궁을 듣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거야? 대화했다는 학생이 내놓는 답이 일품이다. 청혼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독은 전임 연출자와 학생들의 이야기, 또 갈수록 깊어지는 듯 보이는 정 교수와 외삼촌의 관계를 두 기둥으로 삼아 이를 대하는 전임의 요상한 태도를 부각한다. 앞서 전임 연출자가 학생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내밀히 알지 못하면서도 적대적인 대응을 이어갔듯, 정교수와 외삼촌의 만남에 대해서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해가 강이 돼 흐른다
영화는 마침내 그 결말에 이르러 전임이 그와 같이 행동한 이유를 듣게 된다. 정 교수가 자리를 비운 참에 외삼촌을 향해, 어쩌시려고 그러느냐고 이혼이라도 하실 거냐고 날 선 물음을 터뜨리는 장면 말이다. 그 앞에서 튀어나온 외삼촌의 답변. '나 이혼했어. 작년에.' 벌써 십수 년을 별거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했다는 그의 말에 전임을 할 말을 잃어버린다.
열흘을 준비한 촌극은 실패로 끝난다. 작품이 끝나갈 무렵엔 야유까지 튀어나왔다고 했다. 여대 특유의 유별난 성 감수성에 작품이 미치지 못한 탓이라고, 또 연출자인 외삼촌의 사상적 이력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고, 그렇고 그런 위로가 뒤풀이 자리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홍상수는 이 연극이 그저 실패로만 놓아두지 않는 것이다. 뒤풀이 자리에서 나눠진 감상은 앞의 열흘 동안 만들어진 유대와 신뢰가 이들에게 쉬이 무너지지 않는 관계를 쌓아올렸음을 알도록 한다. 총장에게 정 교수와 전임까지 호출되는 와중에 이들은 저들이 어떤 작품을 함께 만들었는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를 관객 앞에 내보인다. 바로 이것이 진실이다. 연극에 쏟아진 야유며 호출돼 들어간 이들 앞에서 표출됐을 총장의 말들 따위가 훼손할 수 없는 진실 말이다.
영화의 제목인 '수유천'이 무엇인가. 전임이 베틀을 짜서 만드는 작품은 한강 본류로부터 영감을 얻은 '플로잉워터 한', 다시 그 상류인 '플로잉워터 중랑', 그리고 '플로잉워터 수유'로 강을 거슬러올라가는 작업이라고 했다. 또 전임과 정 교수, 외삼촌이 함께 장어를 구워먹던 그 가게 앞에 흐르는 물이 수유천 가운데서도 상류라고 했다.
영화의 마지막, 전임은 홀로 그 상류를 거슬러 오른다. 그리고 한참 뒤 그녀를 소리쳐 부르는 외삼촌의 부름에 응답해 돌아온다. "거기 뭐가 있어?" 하는 물음에, 해맑게 웃으며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하고 답하는 전임. 말하자면 이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는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진지한 마음에도 그저 한 바탕 불장난이며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또 제 아내를 두고 무책임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고 그런 의심과 오해가 아무렇지 않게 태어난다.
오해가 범람해 강이 돼 흐른다. 막상 거슬러 올라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수유천>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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