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바야흐로 그가 예술가의 길을 걷던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전반은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라디오 대신 텔레비전이라는 전자기술로 가득한 상자가 보편화되던 시절이다. 기계와 전자기술 발전으로 흑백을 넘어 컬러 TV가 대중화되고, 인공위성이 성층권에서 가동되는 급진적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인 백남준은 아직 사치품에 가깝던 TV와 초기 버전의 VCR 카메라에 매료된다. 아직도 예술계는 회화와 조각이 순수 장르, 사진과 영화는 통속에 불과하다고 등급을 나누던 시기에 백남준은 예술로 분류되지도 않던 비디오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도전한다. 기술문명의 이기를 소화하기 위해 물리학과 전자공학을 마스터할 정도였다. 심지어 자신의 거리 퍼포먼스를 위해 1960년대 중반에 벌써 실용적으로 구동되는 로봇을 제작해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비디오아트의 초창기 걸작 중 하나인 <글로벌 그루브>를 1973년 야심차게 선보이지만, 오늘날 MTV를 필두로 한 뮤직비디오의 효시로 통하는 해당 작업은 그 기술적 성취와 비전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외면에 가로막힌다. 어느새 중년이 된 상황이지만 동료 전위예술가 아내와 함께 여전히 생활고에 쪼들리던 처지는 여전했다. 그런데도 돈만 생기면 앞뒤 안 가리고 눈에 들어온 소품을 '지르던' 백남준은 1975년, 그렇게 충동 구매한 불상을 CCTV와 결합한 (훗날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될) <TV 부처>를 선보이게 된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의 대비를 구현한 해당 작업을 통해 비로소 그는 대중적 명성과 함께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제 비약적으로 보장된 활동기반을 바탕으로 자신의 머릿속 아이디어로만 떠돌던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선보일 기회가 온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백남준은 생애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서구 근-현대 문명에 대해 외부자로서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온 그로선 일생일대의 반론권을 행사한 것은 물론, 비디오아트를 넘어 20세기 말 인류 과학기술의 정점이라 할 인공위성 네트워크를 활용한 생방송 퍼포먼스에 도전한 것이다. 20세기를 상징하는 비판적 지성으로 손꼽히던 조지 오웰이 그의 대표작 <1984>에서 기술독재로 흐르는 근 미래 '디스토피아'를 예언한 것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려는 실천이기도 했다. 그 <굿모닝 미스터 오웰> 퍼포먼스가 1984년 새해 첫날 세계 곳곳을 연결하며 동시 방영되기에 이른다. 이후 그에 맞먹는 대작들을 1980년대 내내 선보인다.
그리고 34년 만에 고향땅에 귀국해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수출상품으로 거대한 명성과 각광을 획득하고 만다. 실로 금의환향이라 할 만하지만 이미 부모님은 모두 별세한 뒤였다. 게다가 가족이 경영해온 대기업은 박정희 정권에게 부정축재 명목으로 몰수당해 형제자매 대부분은 일본으로 귀화해버렸다. 그럼에도 이제 국가적 환대를 받게 된 백남준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설치작품인 <다다익선>등을 작업한다. 또한 광주 비엔날레의 산파 역할을 도맡는 등 한 세대가 훌쩍 지나 돌아온 고향에 많은 선물을 안긴다. 독일 유학파에다 한국의 군사독재에 반대활동을 펼치던 음악가 윤이상처럼 적극적으로 발언하진 않았으되, 그가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면 온전한 활동은 어려웠을 것이란 추측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인 셈이었다.
백남준이란 거대한 '숲'을 투영하도록 이끄는 가이드
하지만 왕성한 활약도 잠시, 1960년대 교우하던 벗들의 죽음을 거듭 목격하게 된 1990년대를 맞이한 백남준은 젊은 시절 무리를 해서인지 갑작스레 중풍을 맞이한다. 투병생활 과정에서 이 세계적 예술가는 지체장애인 신세가 된다. 나날이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어느새 현대예술을 상징하는 아이콘 자체가 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다 2006년 세상을 떠난다. 영화는 그의 염원이 투영된 유작과 함께 이 거대한 예술가의 궤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과연 압도적인 이름 아래 가려진 그는 어떻게 기억해야 마땅한지 갈무리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거의 2시간 가까운 분량을 꽉꽉 채워내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한 편만으로 거인의 시야를 관객이 날로 먹는 건 불가능함을 숨기지 않는다. 해당 작품은 그야말로 발췌 및 요약에 충실한 개괄 입문서의 역할을 자임하려 한다. 그래서 백남준에 대해 평소 작업을 접해왔거나 해당 분야 소양을 지닌 이들이라면 본 작품이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닐 테다.
하지만 텍스트로만 접해 왔거나 개별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던 일회성 체험에 그친 이들에겐 지금껏 파편적으로 만나온 거장의 진면목을 깨닫게 해주는데 모자람이 없다. 이 작품 덕분에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 그의 시선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이 다른 통합적 분석과 시야를 제공하는 순도 높은 효용성을 마음껏 뽐내려는 작업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 작품의 충실한 연대기적 구성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그저 피상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현대 비디오아트가 어떤 과정과 기반으로 형성되어왔는지 개괄과 함께 배경을 동시에 전해주는 기획은 반갑기 그지없다. 백남준의 얼핏 난해하게만 보이는 일련의 퍼포먼스들이 동시대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가 개별 작가를 초월해 문화담론을 선도하는 '예언자'로 부각되는 이유를 일관된 논리와 맥락으로 제시해준다. 그렇게 적재적소에 안배된 열쇠들로 백남준이란 '거인'이 갖는 가치와 위상에 대해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그런 체험과정을 거쳐 그저 거대한 규모와 현란한 이미지의 춤사위로만 보였던 그의 대표작들이 알고 보니 오늘날 보편화된 '정보 초고속도로'나 유튜브, 인터넷 네트워크, 심지어 IPTV와 OTT 환경을 길게는 반세기 전에 예지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 순간 대체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공전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흔한 미래학자와도 백남준은 격을 달리한다. 단지 기술문명의 발전을 찬양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인류사회의 문제 해결에 전용하고 가능성과 동시에 위험요소도 고찰하려는 태도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모범사례처럼 다가온다.
그는 전위이자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놓지 않은 것은 물론, 후기 식민주의와 서구의 알량한 오만에 대해 통렬한 풍자와 일격을 가했고, 정치군사적 냉전과 전통의 붕괴로 인한 사회문화적 혼란 가운데 냉소와 회의로 치닫기 쉬운 경향에 대해 기술 활용에 대한 낙관적 기대감을 놓지 않도록 격려해왔다. 동양과 서양의 교류를 염원했고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불러온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전기영화를 초월해 거장의 자취를 재현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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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기 다큐멘터리를 온전히 소화해낸다면 이로움이 절대 작지 않을 테다. 일단 현대미술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혹은 매너리즘에 대한 가혹한 배격)에서 벗어나는데 탁월한 효능을 과시할 만하다. 더불어 (밥 먹는 데 아무 실용적 기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보다 여유롭게 접근할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1984년 새해 초반 KBS에서 중계되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 퍼포먼스 방영을 보면서 '뭔가 대단히 멋있어 보이긴 한데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감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었다. 조지 오웰과 < 1984 >에 대해 정말 피상적으로 들어보긴 했지만 이 뉴미디어의 향연이 그와 어떤 관계성을 갖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문헌상으로 백남준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지언정 그의 예술적 진의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던 꼴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3줄 요약은 가능해졌다. 다 이 작품 덕분이다.
물론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영화 속 거장의 탄생과정이 그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강림한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입문용으로 이만한 교재가 또 있을까? 영화는 내용을 충실하게 요약 편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식과 장치의 정교한 배열을 통해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공감각적으로 구현하려는 도전으로 충만해 있다. 마치 백남준을 상징하는 아이콘, 가로세로 정교하게 교차하는 TV 모니터 속 주사선처럼 수많은 다국적 제작진의 협력과 수고 덕분에 근사한 체험을 누릴 기회를 얻었다. 게다가 백남준이란 아름드리 거목을 통해 연결되는 거대한 현대미술의 숲 속 또 다른 거목들을 눈요기하는 호사가 덤으로 추가된다.
물론 어맨다 킴 감독과 총괄 프로듀서이자 (백남준의 생전 글들을 낭독하는) 내레이션까지 도맡은 스티븐 연 등 제작진이 백남준을 기억하고 기꺼이 헌사를 바치려는 마음이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노고를 온전히 체감하기 위해 있기에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감상은 극장 개봉 시기에 큰 화면으로 오롯이 몰입할 때 최상의 가치를 얻게 될 성질의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집중할 때, 백남준이 일평생 추구해온 가치 중 하나의 본연과 영화의 작명이 '통'하는 이치에 근접할 테다.
<작품정보>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2023|미국|다큐멘터리
2023.12.06.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어맨다 킴
총괄 프로듀서 스티븐 연, 스티브 장, 플로렌스 슬론, 팹 파이브 프레디,
알렉산드라 먼로 외
출연 백남준, 스티븐 연(내레이션 역)
수입ㆍ배급 (주)엣나인필름
2023 가디언 선정 올해의 영화
2023 선댄스영화제 경쟁
2023 텔아비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경쟁
2023 코펜하겐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스페셜 프리미어 초청
2023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베리테 초청
2023 MoMA Doc Fortnight 오프닝 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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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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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왜 한국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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