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연인>의 한 장면.
MBC
17세기 초중반에 조선이 그 같은 수난을 겪은 것은 인조 정권의 외교정책이 유연하지 못했던 점, 후금에 이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너무 빨리 강력해진 점, 명나라가 군사·재정적으로 허약해진 점 등에도 기인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들에도 기인한다.
그중 하나는 공급망 파괴다.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한 명나라의 무역제한 조치가 여진족을 더욱 도발한 측면이 있었다.
2021년에 <한중관계연구> 제7권 제3호에 실린 유지원 원광대 교수의 논문 '전쟁과 무역: 동북아 국제질서 개편에 나타난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청태종)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동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시기 후금은 만성적 경제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즉 사르후전쟁 이후 후금의 가장 중요한 젖줄이었던 명조와의 변시무역도 단절되었고, 지배 영역의 확대로 부양해야 할 인구의 증가로 경제적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기술한다.
사르후전쟁 때 명나라 군대는 참패하고,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조선군은 의도적으로 투항했다. 광해군 폐위 4년 전에 벌어진 이 전쟁에 대한 보복으로 명나라는 여진족과의 국경무역을 중단시켰다.
이런 보복 조치가 여진족 경제에 끼친 영향 중 하나는 직물 수급의 곤란이었다. 김한규 서강대 교수의 <한중관계사> 제2권은 1977년에 나온 전해종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명과의 단교로 인해 증대된 직물 등의 수요를 충족시키 위해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명나라의 공급망 파괴로 인한 직물 수급의 곤란도 정묘호란의 한 가지 원인이 됐던 것이다.
공급망을 끊어놓으면 살기 위해서라도 투항하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 투항을 하기보다는 더 악착같이 싸우는 쪽도 있다. 여진족은 후자였다. 이들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명나라의 조치는 정묘호란이라는 불똥을 조선에 떨어트렸다.
17세기 초반에 여진족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기후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으로 남하해 왕조를 건설한 5호 16국 시대(317~439)를 연상시키는 일이 17세기에도 있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내려갈 때는, 북쪽 지방의 목초지 감소로 유목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남하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방 국가들이 남침을 하거나 북방 난민들이 남쪽에 국가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기원전 29년 이후의 한랭건조기 속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북방의 다섯 유목민들이 북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16개 왕조를 세운 5호 16국 시대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타이완 기상학자인 류자오민의 <기후의 반역>에 따르면, 1600년부터 1720년까지는 춥고 건조한 소빙하기였다. 1670년과 1671년에 조선에서는 자연재해·전염병·기근으로 47만 혹은 140만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같은 17세기의 기후변화는 인간 건강이나 경제에 영향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여진족의 남진을 초래하는 결과로도 이어져 동아시아 질서를 크게 격변시켰다.
안 그래도 기후변화로 인해 남진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여진족이다. 인조정권과 명나라의 동맹 강화에 더해 명나라의 공급망 파괴는 그런 여진족을 더욱 자극했다. 우리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압박과 봉쇄 정책은 결국 조선에 화근이 됐다. 이런 상황이 드라마 <연인>의 저변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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