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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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시하고 천대한다.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의 위 장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은 친숙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진족은 한없이 무시했다. 여진족이 고대 한민족에서 분리됐을 뿐 아니라 고구려·발해 때까지만 해도 한 울타리에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야박한 대우였다.
한국인들이 여진족을 배척하는 것은 금나라와 청나라에 눌린 굴욕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업구조나 경제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문명을 발달시킨 주류 한민족과 달리 여진족은 농경문명보다는 유목문명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한민족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라며 그들을 천시했다. 수렵문명보다는 유목문명이 선진적이고 유목문명보다는 농경문명이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이런 관념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해버리기에는 그들이 이룩한 객관적 결과물이 너무 거대하다. 김함보의 후손들이 왕실을 형성한 여진족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도 진출하지 못한 중국 내륙으로 진입해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금나라는 중국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사회를 이끌었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금나라를 능가하는 결과물을 구축했다. 청나라는 북중국뿐 아니라 중국 전역을 통할했다. 13세기에 몽골 기마병이 동유럽과 중동까지 휩쓴 이후부터 1840년 아편전쟁에서 서유럽이 중국을 꺾기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최강국의 권위에 필적할 강대국이 여타 지역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여진족 청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끌었다. 1840년 이전까지는 청나라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나라는 그런 결과를 거두는 과정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치욕과 상처를 조선왕조에 안겼다. 그 이전의 금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왕조에 상당한 아픔을 안겼다. 그래서 금나라와 청나라의 성과를 평할 때는 그것이 고려와 조선에 미친 부정적 영향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 해도, 금나라나 청나라가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발해 멸망을 계기로 한민족과 말갈족(여진족)은 갈라졌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926년이다. 앞으로 3년 뒤면 1100주년이 된다. 한민족과 말갈족이 갈라진 것은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민족이나 문명의 분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이처럼 '불과' 천년 전만 해도 한 식구였던 여진족이 지금은 남남이 되어 있다. 오늘날 그들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여진족의 역사도 자기네 역사였다면서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이 유목민이고 전쟁의 상처를 입혔다는 등등의 이유로 한민족이 그들을 남남으로 다루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남남처럼 인식되는 현상은 동족이 남남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연인>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연인이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은 같은 민족일지라도 어느 순간 이민족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다. 하나였던 민족이 갈라져 남남처럼 지내는 일은 대륙에서 당기는 힘과 해양에서 당기는 힘을 함께 받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는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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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