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탄생> 스틸컷
민영화사
제국주의의 광풍이 전 세계에 몰아치던 19세기,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 건설에 앞장섰고, 문명개화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전통문화를 무참히 짓밟았다. 심지어 원주민 학살에 협조한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섣불리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건 안다. 구한말 헐버트나 베델처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도 있고, 반대로 이완용처럼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위해 살다간 한국인도 있는 법이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로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의 헌신적 삶을 폄훼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 묘사되는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납작하다'. 그저 조선을 위해 살았고, 조선을 위해 죽었다는 것뿐이다. '조선을 위해'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표현은 관객에게 종교 영화의 한계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기 위해서 '약간의 무리수'는 불가피하다고 여긴 걸까.
조선을 위해 산 프랑스 선교사들의 잇따른 순교는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의 조선 침략을 불러왔다. 머지않아 일본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과 강제적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끝내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프랑스는 선교 활동의 자유를 조약 체결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웠다.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 선교 활동은 자유였다.
영화 <탄생>이 놓친 것
영화에서는 짐짓 모르는 척 눙치고 있지만,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동일시한 조선 근대의 '탄생'은 어찌 됐건 제국주의 침략과 궤를 같이한다. "양반이든 천민이든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평등한 세상"이라는 대사만으로 서구의 근대가 끼친 해악을 덮을 순 없다. 선교사들이 설파한 만민평등의식은 되레 제국주의 침탈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김대건 신부가 도탄에 빠진 조선의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써 가톨릭을 전하려 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인 사제로서 그 역시 조국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그가 꿈꾼 빈부귀천이 없는 평등 세상이 당시 제국주의 국가의 '도움' 없이 조선에 이식될 수 없음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선교 활동의 자유가 조선 민중의 삶을 구원하진 못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박해가 없었다면 봉건적 신분제가 사라지고 김대건 신부가 꿈꾼 만민평등사회가 도래했을까. 신분제의 폐지로부터 시작된 근대적 개혁의 결말이 어땠는지는 우리의 참혹했던 식민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역사 교사라서일까. 청년 김대건의 불꽃 같은 생애보다 그를 둘러싼 시공간적 배경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사제 서품 당시 조선을 위하여 일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대륙을 제패한 제국들이 조선을 복속시키지 못한 이유를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 의지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영화 속 김대건의 대사가 '국뽕'으로 읽히는 것도 그래서다.
사족. 아무리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기 위한 영화라지만, 조선교구 설립에 공헌한 정하상 바오로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김대건 신부를 그림자처럼 보필하고 함께 순교한 현석문 가롤로, 역관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도운 조신철 가롤로 등의 업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 건 못내 아쉽다. 이들 모두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가톨릭 103위 순교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화에선 함께 신학생으로 파견됐다 풍토병에 걸려 숨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물론, 조선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스조차 존재감이 미미하다. 김대건 신부의 삶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불과하다. 하긴 이들은 아직 시성은커녕 시복되지도 못했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전국을 걸어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다 마흔의 나이에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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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