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변화는 작은 곳에서 온다
때로 중요한 변화는 아주 작은 곳에서 온다. 학부모 면담 이후 낙담한 마르틴을 위로하려 모인 친구들은 그의 심각한 모습에 술을 권한다. 언제나 엄격하게 지내는 그에게 약간이나마 풀어지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권한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쯤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는, 어느 연구를 가져와서는 취하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권한다. 주저하던 마르틴이 술을 들이켜고 오래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듯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나온다.
술의 효과를 본 마르틴은 음주수업을 시도한다. 딱 0.05%만 혈중 알코올 농도를 올리고는 수업에 들어간다. 그날 수업은 얼마나 멋졌던가. 학생들은 마르틴을 다시 보고, 마르틴도 스스로를 다시 본다. 마르틴은 그 멋진 수업 뒤 친구들에게 제가 음주를 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친구들은 모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연구대상은 그들 스스로다.
변화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가만히 앉아서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어렵다. 흔히 중년의 위기라 표현되는 방황이며 우울도 제 자리만 지키다 망가져가는 저를 돌보지 못해 생기는 것이지 않던가. 삶에 변화를 주어 제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처박혀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인간에게 색다른 자극이 된다. 영화 속 네 친구에겐 알코올이 그 수단이다.
마르틴의 역사수업은 점차 활기를 띤다. 축구시합은 즉흥적이며 격정적이 되고, 음악수업은 더 감상적으로, 심리학 수업은 비로소 다른 이의 문제를 깊이 바라보게 이끈다. 수업들이 나아지고 삶에도 감정이 얹어진다. 너무 오래 제 자리에 앉아 마비됐던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상들은 인간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너무 쉽게 돌보지 않는단 걸 깨우치게 한다. 어쩌면 정말 인간이 최상의 인간이 되기 위해선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들의 변화도 극적이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술이 바꿔낸 것들, 술이 망쳐버린 것들
물론 영화는 알코올의 효용만을 찬양하지 않는다. 술이 술을 부르고 중독을 부르고 급기야 인간을 망치는 모습까지를 감추려 들지 않는다. 영화가 비추고자 하는 건 술 그 자체가 아니라, 저와 저의 감정을 돌보는 것이란 걸 영화는 일깨우려 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말 그대로 지쳐 있던 삶에 다음 장이 있다는 걸 알린다. 마르틴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재즈발레 댄스를 춘다. 술을 들이부으며 인생을 즐긴다. 그에겐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것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는 걸 그도, 관객들도 안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이.
인물들은 술로써 인생을 긍정하고, 술로써 인생을 부정한다. 그것이 진정한 술꾼의 삶이다. 술을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이라면 이 영화가 말하는 슬픔들과 기쁨들에, 절망과 희망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 뭐 한 라운드 끝나면 다음 라운드 뛰는 것 아닌가. 녹아웃 당하고 뻗거나 탭을 치고 드러눕지 않을 것이라면 가야지 어쩌겠나. 기왕 갈 거라면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토마스 빈테베르그 감독은 이 영화 촬영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딸을 잃었다. 영화 속 마르틴의 딸로 등장하기로 했던 어린 이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 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화 안에 제가 느낀 절절한 감상을 그대로 녹여내길 선택했다. 그래서 영화 속엔 절망과 우울, 슬픔과 패배감이 함께 흐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마르틴의 격정적인 춤사위가 터져 나오기에 이른다.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삶은 계속 흐르는 것이라는, 그 모든 기쁨과 슬픔들을 생생히 느끼면서 인간은 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가 관객에게 전한다.
나는 이 영화보다 술을 더 부르는 영화를 정말이지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2022 유럽영화제
2022 E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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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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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기쁨과 슬픔, 이보다 적나라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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