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없는 전쟁, 냉전(冷戰/ Cold War)은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이 약 반세기에 걸쳐 대치했던 상황을 의미한다.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리는 듯했던 냉전시대는 2010년대 이후 중국-러시아 등의 약진으로 인한 신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또다른 현재진행형으로 여겨진다.
냉전 시대는 전쟁으로 모든 인류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극에 달한 시대였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간절하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류는 냉전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나가야만 할까.
지난 27일 방송된 KBS1 시사교양 <역사저널 그날> 353회에서는 '철의 장막 소련70년 2편-냉전과 열전 사이'라는 주제로 냉전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고찰이 이루어졌다.
냉전의 반대말인 열전(Hot war)은 직접 무력을 사용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다. 2차대전 이후 양대 진영을 대표하는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강력한 핵무기가 가져올 상호확증파괴의 두려움으로 직접적인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대국간의 냉전은 제3세계를 통하여 일종의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전으로 유발되곤 했다. 1950년 한국사의 비극인 6.25 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중동 전쟁 등도 냉전의 파생물이자 진영의 대리전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재한 미국인 크리스 존슨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 전쟁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로 불린다고 밝혔다. 제2차 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서 벌어져서 오늘날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의미였다.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까지 나치 독일에 함께 맞서싸운 동맹이었지만 종전 직후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46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라디오 연설에서 그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표현을 쓰며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공산국가들의 폐쇄성을 지적했다.
당시 소련은 스탈린 집권 하에서 대숙청과 강제노동 수용소 등으로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었고,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 안에는 소련의 영향권안에 들어갈 공산국가들도 그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처칠의 연설은 이른바 20세기 냉전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분기점으로 회자된다.
현재 러시아와의 전쟁중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지난 2월 24일 대국민연설을 통하여 처칠의 연설을 인용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새로운 철의 장막이 내려오는 소리이자, 러시아가 문명세계를 떠나 문을 닫는 소리"라는 젤렌스키의 주장은, 역사는 언제든 반복될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 장면이다.
스탈린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서방 자유진영과 소련 영토 사이 완충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주위 국가들을 소련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여 소련의 안보를 확보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오늘날 러시아의 안보를 핑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논리와도 다를게 없었다.
또한 자유진영 지도자들은 그런 소련의 팽창정책을 보면서 스탈린이 서유럽까지 넘보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외교정책을 제시하며 공산주의 지배를 거부하는 국가에 대하여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을 설립하여 동맹국들간 군사적 연대의 근거를 마련했다.양 진영은 그렇게 상호 불신이 팽배하면서 대치관계로 접어들었다.
1953년 소련의 절대권력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냉전체제는 전환점을 맞게된다. 생전 자신을 철저히 우상화했던 스탈린의 의도와 달리, 사후에 그의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바로 내부에서 제기됐다. 소련의 새 지도자로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 사후 치러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체제의 어두운 면을 가감없이 폭로하고 비판하는 파격적인 '스탈린 격하 연설'로 화제를 모았다.
흐루쇼프가 주도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소련 사회에서도 그동안 억눌려왔던 스탈린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국가적 선전과 여론조작으로 스탈린을 신적 존재처럼 숭배해왔던 평범한 소련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기도 했다.
흐루쇼프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정치지도위원으로 선동 연설 분야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스탈린의 총애를 받게 됐다. 1960년 UN총회에서는 무례하고 공격적인 연설로 전세계에 소련과 공산체제를 상징하는 인물로 각인됐다. 미국과 자유진영 입장에서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최후와 전임자의 업적을 격하하는 파격적인 후임자의 등장은 호재로 느껴질 법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역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서방세계와의 대결구도에서는 표면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려던 인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냉정하고 잔혹한 이미지가 강했던 스탈린과 달리, 흐루쇼프는 의외로 냉전시대의 지도자치고는 상상하기 힘든 귀여운 일화들도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무역박람회에는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당시 박람회장에서 만난 흐루쇼프 소련제1서기와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간의 부엌 논쟁은 냉전 시대 최고의 설전으로 회자된다.
닉슨이 박람회장에 있는 모델과 같은 식기세척기를 갖춘 집이 미국에서 흔하다고 자랑하자, 흐루쇼프는 소련의 주택이 미국보다 더 튼튼하게 지어졌다고 맞받아쳤다. 흐루쇼프가 "미국의 집은 수명이 고작 20년이지만, 우리는 아들과 손자들까지 생각해서 튼튼하게 집을 짓는다"고 자랑하자, 닉슨도 바로 지지않고 "미국인들은 20년이 지나면 새 집과 부엌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 마치 초등학생들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유치한 언쟁 내용과, 사진에서 피차 제대로 빈정상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두 지도자의 표정이 백미다.
일자무식에 자수성가한 흙수저 출신이었던 흐루쇼프는 평소에도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어록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왔다. 설전을 벌였던 닉슨과는 한 TV 프로그램에 동반출연하여 "앞으로 7년 정도면 미국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도발하며 또 한번 만담 배틀을 펼쳤다. 당시 소련의 영향권안에 있던 서베를린을 '서방의 고환'에 비유하며 "서방의 비명이 듣고싶을 때마다 베를린을 쥐어짤 것"이라는 드립을 남긴 것도 유명하다.
하지만 7년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흐루쇼프의 선언이 단지 허풍이 아니었다.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의 발사에 성공하며 전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1961년에는 마침내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하는데 성공한다.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소련의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우주는 아주 검지만 지구는 푸르스름했다"는 소감을 남겼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통하여 소련의 과학기술이 예상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악한 미국은 이후 NASA 설립, 과학-수학 위주 교육과정 개편 등 대대적인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는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미-소 우주개발과 군비 경쟁의 본격적인 서막이기도 했다.
소련의 스푸티니크 발사성공에 가져다준 진정한 충격이란, 곧 로켓을 활용한 핵무기의 장거리 공격 기술을 최초로 입증했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핵공격을 하려면 폭격기로 적국 본토까지 직접 핵폭탄을 이동하여 떨어뜨리는 방법밖에 없었고 미국은 공군력과 핵탄두 숫자에서 소련보다 압도적 우위를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푸티니크 쇼크 이후 미국인들은 자신들도 더이상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를 함께 살릴 수도, 함께 멸망시킬수 있는 과학기술의 명암을 보여준 장면이기도 하다.
1962년 10월 22일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으로 꼽히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당시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반미정권을 수립하자 미국은 CIA를 통하여 카스트로를 제거하려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위협을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고 흐루쇼프가 이에 화답하면서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기로 결정한 것.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핵전쟁에 아주, 아주 가까이 갔다"고 평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미국은 일단 차선책으로 소련의 무기진입을 막기 위하여 쿠바의 해상봉쇄를 단행한다. 1962년 10월 27일 쿠바 상공을 지나던 미국 첩보기가 소련의 미사일에 격추되고 조종사가 사망하는 '검은 토요일' 사건이 발생하며 양국의 전쟁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또한 쿠바 해협에 도착한 소련 핵잠수함은 미국 구축함과 전투태세에 돌입하며 독자적으로 핵무기 사용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마지막 통제장교의 반대로 다행히 발사되지는 않았다.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양국 지도자인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해법을 찾기 위하여 결단을 내린다. 특히 흐루쇼프는 '터키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을 철수한다면 소련도 쿠바에서 철수하겠다'라고 먼저 제안했고 정부간 채널이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한 공개적인 메시지로 자신의 의지를 전하면서 케네디도 화답한다.
이 사건은 국가 위기 상황일수록 지도자의 냉철한 판단력과 평화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당시 미소양국 모두 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군부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강했지만,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우선순위에 둔 두 정치 지도자들의 용기있는 결단 덕분에 최악의 파국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케네디는 암살당하고, 흐루쇼프는 실각하게 되면서 역사적 업적을 이끌어냈던 두 지도자의 말로가 모두 좋지 못했다는 것은 묘한 운명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 어떤 무기가 쓰일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3차대전은 모르겠지만 4차대전은 아마 돌멩이와 막대기로 싸우게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긴 바 있다. 핵전쟁 이후 문명이 붕괴된 인류는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우며 전쟁의 참상을 우회적으로 암시한 경고였다. 인류가 대량살상무기와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아인슈타인의 경고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에서 차가운 냉전이 언제든 뜨거운 열전으로 전환될 뻔했던 고비는 많았다. 그럴때마다 인류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전쟁의 참상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이었다. 반세기전 지구 반대편에서 대립한 미국과 소련도 이러했을진데 분단국가이자 지정학적인 요충지로 꼽히는 한반도의 전쟁 위협 현실은 역사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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