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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족 한목소리 "누가 자식 살해 당하는..."

[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22.03.23 14:16최종업데이트22.03.2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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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오랜 갈등의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고 어떻게 극복해야만 할까. 3월 22일 방송된 tvN 인문학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의 중동 지역 전문가 박현도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쳤다.
 
중동은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사건사고가 많았던 지역 중 하나다. 박 교수는 그중에서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중동의 수많은 분쟁과 전쟁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전세계가 무려 100여 년 이상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여전히 참혹한 전쟁과 충격적인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21년 5월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공습과 폭력으로 약 300여 명의 사망자와 2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대 종교에서 모두 성지로 꼽힌다. 고대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무덤인 성묘 교회가 있는 곳이며, 무슬림들에게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마드가 하늘로 승천하여 신을 만난 장소로 여겨진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 아랍어로는 '성스러운 도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팔 분쟁의 본질적 핵심

박 교수는 이팔 분쟁의 본질적 핵심이 종교보다는 땅에 있다고 지적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유대인과 아랍인들간의 민족 대결이라는 것.
 
하나의 땅에 두 개의 나라가 세워진 독특한 현상은 수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유대인의 비극에서 비롯됐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유대 민족의 지도자였던 아브라함은 이라크 남부에서 살다가 신의 계시를 따라 '가나안'이라고 일컬어지던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은 대흉년을 피해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 땅으로 이주했으나 유대 민족의 번영을 경계한 이집트의 탄압을 받게되며 약 400년간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모세는 박해받던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돌아갔으나 이때는 이미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족인 블레셋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때부터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민족간 피의 역사가 시작됐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했으나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멸망 당했고, 유대인들은 이후로도 페르시아-그리스-로마 제국-이슬람 등 여러 패권 세력들의 지배를 거쳐야 했다.
 
7세기 경부터는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 지역을 점령했고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1917년까지 팔레스타인 땅은 오랫동안 아랍인들의 터전이 됐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에 걸쳐 슬픈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기존에 살던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유대교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사는 유대인 공동체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
 
유럽으로 간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 교리에 익숙한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예수를 신성모독의 죄로 처형한 유대인들은 적대시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없이 떠도는 유대인들은 약자로 취급받으며 수많은 음모론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인하여 약 40년에 걸친 포그롬(집단학살과 탄압)으로 약 15만에 이르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당했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은 이른바 이스라엘 건국의 불씨가 된다.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 장교인 드레퓌스는 군사기밀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종신유배형을 당했고 이를 계기로 반유대인 시위와 마녀사냥이 프랑스에서 확산된다.
 
이 사건을 취재한 유대인 기자 테오로드 헤르출은 큰 충격을 받고 '프랑스처럼 계몽된 나라에서도 유대인이 차별 받는다면, 전세계에서 유대인이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헤르출은 2년 뒤 <유대국가>라는 책을 통하여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조상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취지의 '시온주의(Zionism)'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유대인들은 제 1회 시온주의자 총회를 열고 이스라엘 국기와 국가를 만들며 유대인 국가 건설을 선포한다. 헤르출은 유대인들에게서 현대판 모세로 불린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의 전략은, 부유한 유대인들의 자금력을 활용하여 '유대민족기금'를 만들어 팔레스타인 지주들로부터 땅을 매입하고 텔아비브(현재 이스라엘 수도) 등 팔레스타인 곳곳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중동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인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하여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영국과 손을 잡는다. 하지만 영국은 불과 2년 뒤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을 통하여 유대인에게도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이중 계약을 시도한다.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영국은 프랑스와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중동 지역에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영역을 차지했다.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 되자 영국은 아랍인들을 배신하고 유대인을 선택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진출, 유럽에서 히틀러의 등장과 유대인 탄압 등으로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오는 유대인의 숫자는 해마다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불만이 고조된 아랍인들은 1936년 팔레스타인 시위를 기점으로 민족주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영국에 팔레스타인 독립과 유대인 이민 금지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세계의 패권국들이 개입된 이팔 분쟁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2차대전 이후 영국에 이어 세계의 패권국으로 올라선 미국과 소련도 이팔분쟁에 개입하게 된다. 특히 금융, 정치, 미디어 등에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높았던 미국은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시온주의의 성공을 열망하는 수십만명에게 응답해야 한다. 내 유권자 중에는 아랍인이 없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1947년 UN총회에서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인정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찬성 33표, 반대 13표, 기권 10표로 통과됐다. 가장 핵심적 이해 당사자였던 영국은 기권, 미국과 소련은 모두 찬성에 표를 던졌다. UN의 분할안 통과 이후 팔레스타인의 아랍 영토는 94%에서 50%로 줄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은 UN의 결정을 당연히 거부했다. 그리고 영국은 분쟁의 불씨를 던져놓고 군대를 철수한다. 이후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시작됐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UN 분할안에 따라 예루살렘은 UN이 관할하는 국제 공동구역이 됐다.
 
건국과 동시에 이스라엘은 중동전쟁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였다. 인접한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고 싶었던 아랍국가들의 야욕, 그리고 같은 민족인 팔레스타인을 학살한 이스라엘의 탄압은 전쟁의 좋은 명분이 됐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준비가 덜 되고 손발이 맞지 않은 아랍연합군을 상대로 세 번의 중동전쟁을 잇달아 완승하며 오히려 영토를 확장했다. 아랍에서는 이 전쟁을 안니크바(대재앙)라고 불렀다. 그리고 전쟁으로 갈곳을 잃은 팔레스타인은 약 70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한다. 이들이 전쟁을 피하여 이주한 지역이 바로 지금의 가자-서안 지구였다.
 
아랍 세력은 1967년 아랍연맹 정상회담인 카르튬 결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평화-협상-인정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전세계에 1차 석유파동까지 발생한다.

계속된 전쟁에 지친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메나햄 베긴 총리는 미국의 중재를 통하여 평화협정을 추진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얼마후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또한 이집트에 이어 이란이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조하는 호메이니 정권의 등장으로 함께 반이스라엘 진영에 가담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같은 땅에 공존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계속 악화되어갔다. 팔레스타인은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조직하여 테러로 맞섰다. 1987년에는 민중봉기인 '인티파다'가 벌어지고 무장단체 하마스가 결성되며 이스라엘에 저항했다. 1990년대 소련의 해체로 인한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대거 이주로 많은 팔레스타인들이 또다시 쫓겨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1993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오슬로 협정을 맺고, 팔레스타인에는 영토를, 이스라엘에는 평화를 보장받는 데 합의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역인 서안지구에 자리잡은 유대인 정착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1995년에는 평화협정을 주도한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극우파에게 암살당하면서 사다트 대통령의 전철을 밟게 되며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이후 네탸나후-샤론 등 강경파가 잇달아 집권하면서 평화는 다시 멀어졌다. 2000년 9월에는 샤론의 성전산 방문에 항의하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장발포한 사태가 벌어지며 2차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당시 시위대와 이스라엘 진압군이 충돌한 상황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12살 아이가 총에 맞아 사망하고 아버지가 부상당한 장면은 전세계에 알려지며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00~2003년 동안 무려 100여 건에 이르는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이스라엘 역시 무력진압과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며 양 진영 사이에는 끊임없는 테러와 진압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궁여지책으로 서안과 가자지구에 거대한 분리장벽을 건설하여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킨다. 끊임없는 보복과 혐오의 악순환은 양국의 죄없는 소년들을 향한 증오살인,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50일 전쟁으로 번졌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식 수도로 규정하는 폭탄 발언으로 또다른 피바람을 몰고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0년 8월 13일 아브라함 협정을 통하여 명목상 중동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UAE-바레인과 연계하여 이란을 견제하려는 게 주 목적이었고 이해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문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두 나라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제사회에서도 뾰족한 해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2014년 50일 전쟁 당시 희생 당한 소년들의 유가족들이 남긴 호소는 많은 여운을 남긴다.
 
팔레스타인 유가족들은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누가 자기 자식이 납치되어서 살해 당하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양측 모두 피의 보복을 멈춰야 된다"고 호소했고, 이스라엘 유가족 역시 "보복은 어떤 형태로든 부당하고 잘못되었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의 간절한 목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름을 인정하고 증오를 넘어 평화를 추구해야만 이유에 대한 해답에 가깝다. 정치, 이념, 종교, 정의까지 수많은 그럴듯한 명분 속에서 정작 무고하게 희생 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조금만 더 기울인다면, 평화로 한 발 나아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벌거벗은세계사 중동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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