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미프로농구) 스타 앨런 아이버슨은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18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NBA 역사상 최단신 MVP와 득점왕을 수상했던 아이버슨은, 장신 선수들이 더 유리한 농구라는 종목에서 서류상의 키(size on paper)보다 마음의 크기(size of Heart), 즉 '승리에 대한 열망'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선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여자농구 대표팀도 신장(Size)이 아닌 심장(Heart)으로 하는 농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감격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한국은 13일(한국시각)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란코 제라비카 스포츠홀에서 열린 2022 FIBA 여자농구 월드컵 최종예선 A조 경기에서 명승부 끝에 브라질을 76대74로 꺾으며 값진 첫 승을 신고했다.
이번 최종예선은 올해 9월 호주에서 열리는 2022년 FIBA 여자월드컵에 출전할 12개국을 가리는 마지막 무대다. 16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에 도전하는 한국 여자농구는 처음 출전한 1964년 제4회 페루 대회(당시는 세계여자농구선수권)부터 2018년 스페인 대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본선무대에 개근했다.
한국이 속한 최종예선 A조에서는 개최국인 호주를 제외하고 상위 2개 팀이 본선에 오른다. 한국은 지난 11일 열린 1차전에서는 FIBA 랭킹 10위의 세르비아를 상대로 잘싸우고도 62-65로 아쉽게 석패한 바 있다.
브라질과의 2차전은 사실상 월드컵 본선티켓의 운명을 가늠할 최대 분수령이었다. 나란히 1패씩을 안고 있던 한국과 브라질 모두 일찌감치 서로를 반드시 잡아야 할 1승 제물로 여겼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FIBA랭킹 17위의 브라질은 A조에서 한국(14위)보다 유일하게 순위가 낮은 팀이었지만, 객관적인 전력상 한국보다 높이와 힘에서 우위에 있었다. 특히 한국은 최종전이 최강 호주(3위)인지라 사실상 브라질전을 놓치면 탈락이 확정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브라질의 에이스로 여기던 다미리스 단타스가 부상으로 최종예선에 불참하는 호재가 있었지만, 여전히 브라질은 베테랑 에리카 데 소우자(195cm)를 비롯하여 카밀라 시우바(203㎝), 스테파니 수아레스(198㎝) 등 장신 자원들이 풍부했다. 반면 한국은 에이스 박지수의 부담을 덜어줄 카드가 마땅치 않았기에 높이 열세 속에서 주전들의 파울과 체력관리가 최대 관건이었다.
한국은 초반 심리적인 부담감을 느낀 듯 1쿼터 슛 난조를 보이며 0-7까지 끌려갔다. 하지만 김단비가 레이업슛으로 첫 활로를 뚫은 이후 강이슬이 연속 득점에 성공하여 동점을 만들었다. 양팀은 이후 치열한 공방을 거듭하며 한국은 첫 쿼터를 17-16, 2쿼터를 33-30으로 근소하게 앞서나갔다.
한국은 3쿼터들어 강이슬과 김단비를 중심으로 한 속공이 위력을 발휘하고 침묵하던 박지수의 중거리슛까지 살아나면서 45-34, 한때 11점차까지 점수를 벌렸다. 하지만 3쿼터 5분 32초를 남기고 브라질이 작전타임으로 흐름을 끊은 후, 거짓말처럼 한국의 야투가 침묵하기 시작하면서 브라질의 거센 추격을 허용했다. 한국은 3쿼터가 끝날때까지 단 1점도 더 추가하지 못했고 브라질의 연이은 골밑 공략에 연속 12실점을 내주며 결국 46-45로 역전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한국은 4쿼터 시작 1분여만에 박지수가 4번째 반칙을 저지르며 파울트러블에 걸려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브라질 마리아 데 카바요에게 잇달아 외곽슛까지 허용하며 47-51로 끌려갔다.
반격에 나선 한국은 박혜진이 2점슛과 3점슛으로 연달아 응수하며 추격에 나섰다. 여기에 강이슬의 3점포와 김단비의 돌파가 성공하며 양팀이 동점과 역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팽팽하게 진행되던 4쿼터 3분 40초를 남기고 박지수가 본격적인 해결사로 나섰다. 박지수는 59-60으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바스켓 카운트에 이은 3점플레이로 역전을 이끌었고, 이후로도 정확한 중거리 야투를 연속 적중시켜 3분간 7점을 홀로 책임지며 공격을 이끌었다.
한국은 71-70으로 아슬아슬하게 앞서던 4쿼터 종료 18초를 남기고, 박혜진이 돌파를 시도하다가 다시 밖으로 빼준 패스를 사이드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이슬이 깔끔한 3점슛으로 연결시키며 4점차로 점수차를 벌려 승기를 잡았다. 다급해진 브라질은 파울작전에 나섰다. 강이슬이 자유투를 침착하게 성공시켰지만, 이어진 수비 상황에서 종료 0.8초를 남기고 3점라인에서 상대 파울 유도로 자유투 3개를 내주고 말았다.
브라질은 2개를 적중시키고 마지막 자유투를 고의로 실패하여 리바운드 팁인을 노리는 작전으로 나섰다. 추가득점이나 자유투를 또 허용한다면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가서 한국이 승리를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브라질은 장신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고, 한국 선수들은 사력을 다한 박스아웃으로 브라질의 마지막 리바운드 공격시도를 막아내며 승리를 지켜냈다. 간절했던 첫 승이 확정되는 순간, 대한민국 선수단은 모두 뛰어나와 한데 얼싸안고 기쁨을 감추지못했다.
이날 승리의 주역은 단연 박지수였다. 한국의 기둥인 박지수는 이날 20점 13리바운드 11블록 2어시스트로 국제무대에서 한국 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트리플더블'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브라질은 예상대로 데 수오자와 실바라는 트윈타워를 활용하여 골밑을 집중 노리는 단순하지만 위협적인 전략을 들고 나왔다. 한국이 경기내내 공격에서 외곽포의 기복이 심하여 고생했음에도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박지수가 골밑을 든든하게 지켜주며 수비에서 중심을 잡아준 덕분이었다.
박지수는 전반에 야투가 유독 터지지 않아 고전했지만 수비와 리바운드 등 팀플레이에서 기여하며 힘과 높이가 좋은 브라질의 장신군단을 상대로 무려 전반에만 6개의 블록과 11개의 리바운드를 따낼만큼 고군분투했다. 4쿼터 초반에는 일찌감치 파울트러블에 걸리고도 노련하게 끝까지 코트를 지켰고, 경기 막판에는 연속 득점으로 클러치 능력까지 과시하며 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한국은 박지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국은 세르비아전에서 3점슛 7개를 던져 단 1개를 성공시키는데 그치며 부진했던 슈터 강이슬이 브라질전에서는 21점(3점슛 5개), 5리바운드로 제몫을 다했다. 김단비는 10득점 10어시스트 7리바운드, 박혜진은 12점 4리바운드 5어시스트로 결정적인 승부처마다 분위기를 바꾸는 소금같은 활약을 펼쳐줬다.
한국은 이날 장신군단 브라질을 상대로 리바운드 싸움에서 46-44로 오히려 근소하게 우위를 점했다. 박지수 외에도 모든 선수들이 몸을 사리지않고 상대보다 한 발을 더 뛰어다니는 활동량과 적극적인 리바운드 가담을 보여준 덕분이었다. 그만큼 승리에 대한 간절함과 집중력에서 한국이 더 앞섰다.
한국은 A조 최종전 호주와의 경기에서 패하더라도, 브라질이 최종전인 세르비아에 패할 경우 최소 조 3위로 월드컵에 나서게 된다. 무엇보다 도쿄올림픽 이후 이어진 국제경기 연패행진을 끊고 첫 승을 거뒀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선수단에 큰 자신감이 될 전망이다.
한국은 전주원 감독이 이끌었던 도쿄올림픽에서 잘싸우고도 결과적으로 번번이 고비를 넘지못하고 무릎을 꿇어야했다. '졌잘싸'도 반복되다보면 선수들이 자신감을 잃기 쉽다. 정선민호는 브라질전을 통하여 모처럼 짜릿한 승리의 맛을 다시 경험하며 그간의 부담을 덜고 새로운 동기부여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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